“멈추거나, 앞으로 나아가거나.”
리안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윤재에게는 그 말이 묘한 경고처럼 들렸다.
윤재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아간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리안은 여전히 묘한 미소를 띤 채 윤재를 바라보았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었으니, 길을 찾으라는 뜻이야.”
“너,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야?”
리안은 대답 대신 조용히 손목시계를 꺼냈다. 윤재가 그 시계를 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시계는 분명 그의 것과 똑같았다.
똑딱, 똑딱.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너도 루프에 갇힌 건가?”
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같은 운명을 공유하고 있어. 하지만 넌 아직 그 이유를 모르지.”
윤재는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무슨 이유?”
리안은 잠시 침묵하다가, 윤재를 깊게 바라보며 말했다.
“너 자신에게 물어봐. 도대체 왜 이 실험을 시작했는지.”
윤재는 당황했다.
“그걸 묻는다고? 난 과학자야. 시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지.”
그러나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것뿐일까?”
리안의 말에 윤재는 답할 수 없었다. 사실 이 실험을 시작한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과학적 도전이 아니었다.
그가 놓쳐버린 과거의 시간. 바로 그 사람을 되찾고 싶었기에.
그러나 그는 그 감정을 철저히 억누르고 있었다.
“그건… 상관없어.”
리안은 그런 윤재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직접 보게 될 거야.”
그 순간, 리안의 손짓과 함께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풍경이 일그러지더니, 윤재는 낯익은 장소에 서 있었다.
“여긴…”
윤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 집?”
집 안으로 들어서자, 윤재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가장 큰 후회를 남긴 순간이 겹쳐져 있던 공간.
거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윤재야, 좀 와봐. 이거 같이 보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녀였다.
윤재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리안이 그의 옆에 서서 조용히 말했다.
“지금 네가 보는 건 과거의 조각이야. 그날 네가 무엇을 잃었는지 잊었지?”
윤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해.”
“진실에서 도망칠수록 루프는 반복될 뿐이야.”
리안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이제 선택해. 과거를 마주할 준비가 되었는지.”
윤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름 하나.
정서희.
윤재는 과거의 잔상을 바라보며, 손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뭘 해야 하는 건데.”
리안은 윤재의 질문에 짧게 미소 지었다.
“과거를 되짚고, 루프의 단서를 찾아야 해.”
윤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좋아. 나아가보자.”
그러자 리안이 나직이 속삭였다.
“후회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