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는 고요한 병실을 뒤로 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과거를 마주하라.’
리안의 말은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윤재가 무심코 중얼거리자, 리안이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과거의 진실을 더 깊이 파헤쳐야 해.”
윤재는 리안을 흘깃 바라봤다.
“진실이라니? 이미 충분히 봤잖아. 서희를 잃고, 그걸 되돌리려 했던 나 자신을.”
하지만 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보고 싶었던 부분일 뿐이야. 아직 네가 놓친 기억들이 있어.”
윤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놓친 기억?”
리안은 그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네 시계가 멈추는 순간을 기억해봐.”
윤재는 무심코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여전히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서희가 숨을 거두기 직전…
시계가 처음으로 멈췄다.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가 시간 속에 갇힌 것처럼 되풀이되었다.
“윤재야… 약속해줘.”
약속.
“그래… 그날 서희가 무슨 말을 했었지.”
윤재는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하지만 그 순간, 공기가 일그러지더니 주변 풍경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윤재의 주변에 균열이 생기며, 시간이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이건 뭐지?”
윤재가 놀라며 몸을 움츠렸고, 리안은 차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의 균열이야.”
리안이 설명했다.
“네 기억이 흔들릴수록, 시간의 틈이 더 벌어질 거다.”
윤재는 균열 사이로 보이는 낯선 풍경을 바라봤다.
여기저기 다른 시간대의 조각들이 뒤섞여 있었다.
한쪽에서는 서희와 함께 걷던 행복한 순간이 보였고, 다른 쪽에서는 실험실에서 사고가 일어나던 장면이 재생되었다.
“이게 무슨…!”
윤재는 혼란스러웠다.
리안이 천천히 다가서며 말했다.
“윤재. 이 틈 속에는 네가 잊으려 했던 모든 기억들이 담겨 있어. 그리고 그 기억들 속에 루프를 끊을 실마리가 있다.”
윤재는 숨을 삼키며 균열 속 풍경을 바라봤다.
어느 한쪽에서는 서희가 윤재를 향해 웃고 있었고, 또 다른 쪽에서는 병상에 누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있었다.
“약속해줘…”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윤재는 손을 떨며 균열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약속이 뭐였지? 왜 내가 잊고 있었던 거지?”
그때, 리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서희와의 약속을 되찾아야 해. 그게 네가 시간의 루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니까.”
윤재는 자신을 조롱하듯 귓가에 맴도는 서희의 마지막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손목시계가 점점 느리게 돌아가더니, 마침내 멈춰섰다.
똑딱, 똑딱.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서희… 네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뭐였지?”
윤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균열 속에서 서희가 눈물 젖은 미소로 말했다.
“윤재야… 나를 잊지 말아줘.”
윤재는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가 외면하고 있었던 마지막 약속.
그는 서희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시간을 되돌리려는 집착 속에서 그녀를 잃어버린 것이다.
리안이 그의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이제 선택할 때야. 그녀를 잊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다시 반복되는 루프 속에 갇힐 것인지.”
윤재는 고개를 들고 균열 너머의 서희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난.”
윤재의 선택이 시간의 흐름을 결정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