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망설임과 후회의 그림자가 어렸다. 강지민이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도훈아. 지금 날 만나러 온 이유가 뭐야?”
지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과거의 기억과 함께 예전 감정의 흔적이 어른거렸다.
도훈은 테이블 위에서 손을 엉겁결에 쥐었다 풀었다. “그냥… 너를 보고 싶었어.”
서윤은 속으로 혀를 찼다. ‘보고 싶었다고? 그게 지금 할 말인가?’
지민은 피식 웃었다. “10년 만에? 내가 기억하기로 너랑 난 깔끔하게 끝냈잖아.”
도훈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현우는 조용히 도훈을 지켜보다가 개입했다. “김도훈 씨. 당신이 흔들리는 감정의 정체를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합니다.”
도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난… 지민이를 아직 사랑하는 걸까?”
지민이 한숨을 쉬며 등을 기대었다. “사랑이 뭔지 아직도 몰라?”
서윤이 지켜보던 중, 현우가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여기 이 물을 다시 봐주세요.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도훈이 물병을 들었다. 처음처럼 맑았던 물이 서서히 흔들리더니, 두 가지 색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깊은 푸른색, 다른 한쪽은 흐린 회색이었다.
“이건… 무슨 뜻이죠?”
현우가 설명했다. “당신의 현재 감정이 두 개로 갈라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깊은 푸른색은 현재의 약혼자를 향한 감정이고, 흐린 회색은 첫사랑에 대한 미련이죠.”
도훈은 당황한 듯 물병을 내려놓았다. “그럼… 난 아직 지민이를 사랑하는 건가요?”
서윤이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넌 네가 첫사랑을 사랑한다고 믿고 싶은 거야. 하지만 실은, 네가 사랑하는 건 과거의 감정이지 지금의 지민이 아니야.”
지민은 조용히 웃었다. “정말 현명한 말이네. 도훈아, 네가 날 보고 싶었던 이유는 아마도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일 거야. 불안하니까, 익숙한 감정을 붙잡고 싶었겠지.”
도훈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이 사실임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서윤은 그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안도했다. 이제야 감정의 실체를 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우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이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과거와 현재 중, 어디에 마음을 둘지 선택하는 거죠.”
도훈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난, 앞으로 나아가야겠어.”
지민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축하해. 너의 선택을 응원할게.”
그 순간, 도훈이 들고 있던 물병 속 회색빛이 서서히 사라지며, 푸른색만이 남았다. 서윤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제야 첫사랑의 저주가 풀린 건가 봐.’
하지만 도훈은 여전히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근데, 이게 정말 맞는 선택일까? 그냥 마법 같은 거에 의존해서 결정하는 게… 왠지 찝찝해.”
현우가 차분히 웃었다. “마법은 당신의 감정을 명확하게 보여줄 뿐이에요. 결국 선택은 당신이 하는 거죠.”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훈아, 나는 이제 내 삶을 살 거야. 그리고 너도 그래야 해.” 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잘 지내.”
그녀가 떠나고 난 뒤, 도훈은 여전히 자리에서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서윤이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정말로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이제라도 확실히 알았으면 좋겠어.”
도훈은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이제야 알겠어. 난 앞으로 나아가야 해.”
그 순간,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유리병이 깨지며 안에 있던 물이 맑아졌다. 서윤과 현우는 이를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현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첫 번째 의뢰 완료.”
서윤은 그 말을 들으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건 이제 시작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