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저주를 풀어드립니다.”
한서윤은 테이블 위에 놓인 명함을 바라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로맨스 소설을 담당하는 에디터라는 직업상, 온갖 기묘한 사랑 이야기를 접했지만, ‘첫사랑의 저주’라는 단어는 처음이었다.
“무슨 신종 사기인가.”
그녀는 명함을 뒤집어 보았지만, 연락처 하나 없이 오직 한 줄 문장만이 새겨져 있었다. 아까 카페에서 어떤 여성이 놓고 간 것이었는데, 자신에게 준 것인지, 실수로 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겠지만, 오늘따라 묘하게 끌렸다.
‘어차피 퇴근길인데, 가볼까?’
이런 이상한 문구를 믿는 건 아니었지만, 평소에도 독특한 경험을 소재로 삼는 걸 좋아했다. 누군가 일부러 뿌린 광고라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서윤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명함을 챙겨 들고 주소를 검색했다. 낡은 골목 끝, 그곳에는 오래된 서점이 있었다.
낡은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자 은은한 향신료 냄새가 퍼졌다. 서가 사이로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저 멀리에는 한 남자가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길게 뻗은 손가락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부드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짙은 눈동자가 서윤을 향했다.
“손님이군요.”
낯선 분위기 속에서도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치 그녀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서윤은 한 걸음 물러서려다, 자신이 들어오며 문을 세게 닫은 탓에 도망칠 기회조차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가 ‘첫사랑의 저주를 푸는 곳’인가요?”
그가 살짝 웃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당신도 첫사랑의 저주에 걸렸나요?”
“아니요. 그런 거 안 믿어요.”
서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실 첫사랑이라는 단어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첫사랑을 잊지 못해 괴로워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늘 이해할 수 없었고, 사랑이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감정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의 말에 부정할 수 없는 찝찝함이 남았다. 그녀도 모르게 옛 기억이 떠올랐다.
“당신이 정말 저주를 풀 수 있나요?”
그는 테이블 위에 작은 유리병을 올려놓았다. 안에는 새까만 모래가 담겨 있었다.
“이 모래는 잊힌 감정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첫사랑의 저주에 걸렸다면, 이 모래는 붉은색으로 변할 거예요.”
서윤은 웃었다.
“그럼 간단하겠네요. 제가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드릴 수 있을 테니까.”
그녀는 유리병을 들었다. 그런데 손끝이 닿는 순간, 모래의 색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붉은 기운이 퍼져 나가더니, 순식간에 병 안을 채웠다.
서윤의 표정이 굳었다.
“…이게 뭐죠?”
그는 천천히 눈을 마주쳤다.
“당신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럴 리 없어요.”
“기억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당신이 잊었다고 생각해도,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감정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래가 변하지 않았을 겁니다.”
서윤은 황당한 마음으로 유리병을 내려놓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첫사랑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럴 리 없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모래가 변하는 순간, 잊고 있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첫사랑.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들. 헤어지던 순간의 감정까지도.
서윤은 스스로 놀랐다. 첫사랑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명확하게 기억이 떠오를 줄이야.
“…그래서, 이 저주를 어떻게 푸나요?”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공중에서 한 장의 종이가 내려왔다. 서윤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첫사랑의 저주는, 새로운 사랑으로만 풀린다.”
서윤은 종이를 내려다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결국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라는 말이네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뭔데요?”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당신은 앞으로 30일 동안 나와 함께 사람들의 사랑을 찾아주는 일을 도와야 합니다.”
서윤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보고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네. 첫사랑의 저주를 풀려면, 먼저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돕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서윤은 고민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 같았지만, 방금 전에 모래가 변하는 걸 보고 나니 쉽게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 남자가 하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좋아요. 한 달 동안 당신을 도와주겠어요.”
그녀는 결심한 듯 대답했다.
그 순간, 그의 손끝에서 또 하나의 종이가 나타났다.
“그럼, 첫 번째 의뢰인에게 가볼까요?”
서윤은 그 종이를 받아들었다. 거기에는 단 하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의뢰인: 김도훈 (31) – 10년 연애 후 결혼을 앞둔 남자]
그녀는 종이를 보고 난 뒤,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진짜 마법이 시작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