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회색 빛 도심 속, 업무 스케줄에 매몰된 엘리트 기획자 김재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돈된 수트 차림, 신경 쓴 머리 스타일, 그리고 완벽하게 각 잡힌 태도까지. 어느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그는 회사에서 맡은 프로젝트 때문에 홍대라는 낯선 곳에 파견된다. 자유와 예술이 흐르는 거리, 어디에든 낙서와 벽화가 가득한 골목은 그의 정갈한 분위기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재하: (불편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여긴… 정말,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군.”
(고급 수트를 입은 그의 모습은 홍대 거리 속 젊은이들 사이에서 튀어 보였다. 그들 사이에서 그는 마치 길을 잃은 외국인 같았다.)
하지만 상사의 지시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가 맡은 것은 “트렌디한 감각”과 “자유로운 감성”을 담아낼 프로젝트 리서치. 애매한 요구사항에 짜증이 났지만, 묵묵히 예술 공간들을 둘러보기로 한다. 그렇게 작은 갤러리 하나에 들어선 순간, 그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 머물렀다.
(흰 셔츠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약간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작품 앞에 서 있다. 낯선 분위기 속에서도 편안해 보이는 그 남자, 마치 바람처럼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는 그는…)
재하: (혼잣말처럼) “저 사람은… 뭐지?”
그 남자, 사진작가 최현우는 재하의 시선을 느끼곤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현우: (미소를 지으며) “안녕하세요. 이 작품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재하: (약간 당황하며) “아, 아니요… 그냥 업무 때문에 방문했을 뿐입니다. 작품은… 잘 모르겠네요.”
(현우는 오히려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어색한 태도에 흥미를 느낀다.)
현우: “잘 모르겠다는 말, 좋은데요. 사실, 제가 의도한 게 바로 그건데.”
재하: “의도요?”
현우: “네, 작품이 사람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 정확하게 정의하지 않아도, 무언가 떠오르게 하는 거죠.”
(재하는 평소 자신이 듣던 대화와는 너무나 다른 대화에 살짝 당황하지만, 묘하게 끌리는 기분을 느낀다. 현우의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은, 늘 틀에 맞춰 살아온 재하에겐 낯설고도 새로운 감각이었다.)
(그때 현우가 문득 카메라를 들어 재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현우: “혹시 사진 한 장 찍어드려도 될까요? 이 갤러리와 당신의 모습, 뭔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재하: (흠칫 놀라며) “저를…요? 난 그다지 사진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요.”
현우: (웃으며) “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지금 이대로… 잠깐만요.”
(순간, 셔터 소리가 조용한 갤러리 안에 울렸다. 재하는 그저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지만, 현우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카메라 화면을 보여줬다.)
현우: “보세요. 생각보다 잘 나왔어요. 평소 모습보다 편안해 보여요.”
(사진 속의 자신을 본 재하는 미묘한 충격을 받는다. 일상에서 자신이 늘 보여주던 엄격하고 차가운 모습이 아닌, 약간은 어색하지만 부드러운 미소가 담긴 자신의 얼굴…)
재하: (작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보다 괜찮네요. 하지만 제 표정이 편안해 보일 줄은 몰랐어요.”
현우: (눈을 반짝이며) “그럼 다음에 또 한 번 찍어드릴까요? 그땐 더 편한 표정을 담아볼 수 있을지도.”
(재하는 잠시 머뭇거린다.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가슴 속을 채우는 이 느낌. 하지만 그는 곧 시선을 피하며 태연하게 대답한다.)
재하: “흠… 다음은 없을 겁니다. 난 단지 업무상 왔을 뿐이니까요.”
현우: (살짝 아쉬운 표정으로) “그렇군요. 그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그냥 취미로 사진 한 장 찍어드리겠습니다.”
(재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갤러리를 나선다. 하지만 문을 나서던 순간,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뒤돌아본 그는, 여전히 사람들과 즐겁게 소통하며 자유롭게 카메라를 들고 있는 현우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재하: (속으로)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그렇게 그는 돌아섰지만, 마음속에는 묘한 떨림이 남아 있었다. 재하는 애써 이 감정을 단순한 순간의 호기심으로 치부하려 했지만,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