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현우의 일상 속으로

3화: 현우의 일상 속으로

며칠 후, 약속한 대로 재하는 홍대의 작은 카페에서 현우를 만났다. 이건 회사 지시로 이루어진 만남일 뿐이다. 자신에게 그렇게 되뇌었지만, 머릿속 한편에 자꾸만 피어오르는 설렘은 감출 수가 없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가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던 현우가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현우: “기다렸어요, 재하 씨!”

재하: (살짝 미소를 지으며) “별로 늦지 않았습니다만…”

(재하는 현우의 친근한 태도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미소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번진 걸 느끼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메뉴를 고르려던 재하를 보며 현우가 먼저 말을 건넸다.

현우: “이 카페에선 무조건 바닐라 라떼예요. 여기 바닐라 향이 진짜 좋거든요.”

(재하는 무심코 그 제안을 따라 바닐라 라떼를 주문했다. 잠시 후, 따뜻한 커피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신 그는, 예상 밖으로 부드럽고 달콤한 맛에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현우: (장난스럽게)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재하: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보다… 괜찮네요. 사실 평소엔 잘 안 마시는 편인데.”

현우: “가끔은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봐도 좋잖아요. 그러다 보면 자기가 몰랐던 걸 발견할 수도 있고요.”

(현우의 말은 단순한 커피 취향 이상을 의미하는 듯했다. 재하는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의 내면에 스며드는 이 새로운 감각이 낯설었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후, 현우는 홍대 거리의 여러 장소들을 함께 둘러보자고 제안했다. 재하는 살짝 당황했지만,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행을 허락했다. 둘은 골목길을 걸으며, 현우는 마치 자신의 집 안을 소개하듯 재하에게 거리의 예술 작품들, 그래피티, 거리 공연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재하: (주위를 둘러보며) “이런 걸 매일 보면서 살다니… 신기하네요.”

현우: “저는 이곳에서 에너지를 얻어요. 매일이 다르고, 매일이 새롭거든요. 재하 씨도 이곳을 좀 더 즐겨봐요.”

(그 순간, 현우는 카메라를 들어 재하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카메라 셔터 소리에 재하는 고개를 돌렸지만, 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셔터를 눌렀다.)

재하: (당황하며) “잠깐, 사진 찍히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요.”

현우: “그럼, 이왕 찍히는 김에 즐겨보세요. 나중에 이 순간을 보고 웃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어차피 제 카메라 속에선 이 모습이 오래 남을 거예요.”

(현우의 카메라에 포착된 재하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하지만, 동시에 새로움을 즐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유롭게 셔터를 누르는 현우의 모습에 재하는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현우는 정말로 재하에게 그가 모르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완벽함과 틀 속에서 살아온 재하는 이런 일탈이 어색하면서도 묘한 설렘을 자아낸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홍대 거리는 저녁 노을로 붉게 물들어 갔다. 하늘이 붉은 빛으로 물든 그 풍경 속에서, 두 사람은 천천히 길을 걸었다.)

현우: (한참을 걷다 걸음을 멈추며) “재하 씨는… 뭔가 잃어버린 것 같아요. 이곳을 보며 뭔가를 채워가길 바라면서도, 여전히 뭔가를 찾지 못한 사람처럼 보인달까.”

(재하는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 여태껏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렇게 말한 적은 없었다. 철저히 계획된 삶 속에서 남들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현우는 마치 그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재하: “그게 무슨 말이죠?”

현우: “모르겠어요. 그냥, 재하 씨가 뭔가를 찾을 수 있도록… 제가 옆에서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진심 어린 말에 재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 낯선 감정이 그의 평정심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혼란스러워 고개를 돌렸지만, 현우의 따뜻한 눈빛이 어느새 그의 마음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재하: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쩌면, 나도 내가 뭘 놓쳤는지 몰랐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현우 씨가 계속 보여주고 있으니까…”

(재하의 솔직한 고백에 현우는 잠시 놀란 듯 했다. 하지만 곧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현우: “그럼 제가 더 많이 보여드릴게요. 재하 씨가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함께 찾아봐요.”

(두 사람은 말없이 길을 걸었다. 홍대의 붉게 물든 거리, 그 속에서 이어지는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미묘한 감정이 공기 속에 흩어지며, 두 사람의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편안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다음날, 재하의 사무실]

평소처럼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출근한 재하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업무에 집중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현우와 함께 홍대 거리를 걷던 장면이 자꾸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현우의 미소, 자유롭게 카메라를 들던 모습, 장난스럽게 다가오던 그의 말투까지…

‘이러면 안 되지.’

스스로를 다잡으려 했지만, 자꾸만 설렘이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이번엔 자신이 피할 수 없는 감정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며칠 후, 홍대 거리]

그날 이후로도 재하는 일을 핑계로 홍대를 자주 찾았다. 회사에서는 “트렌디한 감각을 알아오라”는 명목이 있었지만, 사실 재하 자신도 그게 변명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현우가 종종 있는 갤러리로 향했다.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서자, 현우는 재하를 발견하곤 언제나처럼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현우: “오, 오늘도 오셨네요? 혹시 이번엔 회사가 아니라, 그냥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니죠?”

재하: (당황하며 시선을 피하고) “어… 그냥, 프로젝트 때문에… 다시 리서치가 필요해서…”

(현우는 재하가 동요하는 모습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는 재하의 변명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번졌다.)

현우: “그래요, 그럼 ‘리서치’를 열심히 도와드려야겠네요. 오늘은 좀 특별한 장소로 가볼까요?”

[홍대 골목의 작은 갤러리]

현우가 안내한 곳은 규모는 작지만 개성 있는 전시가 가득한 작은 갤러리였다. 곳곳에 놓인 조각과 그림들, 그리고 벽을 가득 채운 사진들이 재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현우는 작품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현우: “이 작가는 자신의 불안한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대요. 아까 봤던 건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고… 저건 혼란과 갈등이 주제예요.”

재하: (작품을 바라보며) “현우 씨는… 참 솔직하네요. 이렇게 누군가의 감정과 마주하는 게 편해요?”

현우: “감정이란 건 어차피 다들 갖고 있는 거잖아요. 저는 오히려 누군가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마음 편해요. 그렇게 나를 표현하는 게 예술이기도 하고요.”

(현우의 말에 재하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삶은 늘 완벽함과 질서 속에서 유지됐고, 그 안에서 흔들림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현우의 세계에서는, 그 흔들림조차도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처럼 보였다.)

재하: “솔직하게 말하면… 난 이런 걸 잘 몰라요. 아니, 감정을 드러내는 게 낯설어요. 모든 게 계획대로 이루어져야 안심이 돼요.”

(현우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 “재하 씨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그렇게 모든 걸 관리하고 통제하면서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가끔은 조금 흔들려도 괜찮아요. 그래야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될 수도 있거든요.”

(현우의 말에 재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의 평온한 눈빛이 재하의 마음속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듯했다. 자신도 모르게 현우의 눈을 바라보던 재하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재하: “그게… 무서울 때가 있어요. 무너질까 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현우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현우: “그럼 무너져도 돼요.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그 한마디가 재하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무너지면 옆에 있겠다는, 말 그대로의 그 약속이 이상하게도 그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무너짐을, 현우 앞에서라면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홍대 거리]

갤러리를 나와 두 사람은 천천히 붉은 노을이 깔린 거리를 걸었다. 거리에는 여전히 예술가들이 작업을 하고, 사람들이 모여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과 어울리는 현우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반면, 그 옆에 서 있는 자신은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게 신경 쓰였다.

재하: “여기 있는 사람들은… 참 자유로워 보여요. 나랑은 다르게.”

현우: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재하 씨도 이렇게 함께 있잖아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유로워져도 괜찮아요.”

(재하는 그의 말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걸음을 늦췄다. 노을이 길을 붉게 물들이고, 바람이 살짝 불어오는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회사도, 성공도, 계획도 잊은 채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4화 흔들리는 가치관

4화 흔들리는 가치관

며칠이 지났지만, 재하는 일상 속에서 깊은 혼란을 느꼈다. 언제나 정확히 짜여진 일정과 철저한 계획 속에서 마치 기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