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났지만, 재하는 일상 속에서 깊은 혼란을 느꼈다. 언제나 정확히 짜여진 일정과 철저한 계획 속에서 마치 기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삶. 아침에 정장을 입고 출근해 하루 종일 숫자와 데이터를 다루며 회사에서 요구하는 완벽한 성과를 내는 것. 그게 그의 전부였다.
하지만 홍대에서 현우와 보낸 짧은 시간들이 그의 일상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냈다. 일을 하면서도 집중이 잘 되지 않았고, 컴퓨터 화면 속 숫자들이 갑자기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머릿속에는 현우와 함께 걷던 홍대의 거리, 그가 지어 보였던 장난기 어린 미소, 따뜻한 눈빛이 자꾸 떠오르며 마음을 어지럽혔다.
[고요한 회의실]
어느 날, 중요한 프로젝트 회의가 열렸다. 재하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가리키며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화면 속에는 회사의 성장 목표와 미래 사업 계획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언제나처럼 완벽한 발표, 완벽한 자료 준비, 완벽한 전략. 그는 자신이 세운 계획대로 또박또박 설명을 이어갔다.
재하: “그래서 이 수치를 기반으로 3분기에는 10% 이상의 성장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를 위해…”
(말을 하던 재하는 문득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고층 빌딩들이 끝없이 늘어선 회색빛 거리,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쉴 새 없이 흐르는 시간. 그리고 그 속에서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홍대에서 현우와 함께 걷던 시간이 불현듯 떠올랐다. 빌딩숲과 차가운 공기가 아닌, 예술과 자유가 넘치는 거리, 그리고 그곳에서 느꼈던 편안함과 즐거움… 그 모든 것이 이 회의실의 공기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그리고 무심코, 그의 속마음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재하: “정말… 이것이 최선일까요?”
(회의실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동료들과 상사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재하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수습했다.)
재하: “아…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더 나은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현재 전략이 가장 효과적이긴 하지만…”
(상사인 최 부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재하를 쳐다봤다.)
최 부장: “김재하 씨,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요즘 들어 집중력이 떨어진 것 같군요.”
재하: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죄송합니다. 다소 피곤했던 것 같습니다. 발표 이어가겠습니다.”
(재하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발표를 마무리했지만, 상사의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언제나 완벽함을 고집해 온 재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실수였다. 그의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밤, 홍대 거리]
그날 밤, 재하는 무작정 홍대 거리로 나왔다. 집으로 곧장 가기엔 답답했고, 회사로 돌아가기엔 자신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는 발길을 홍대의 골목으로 돌렸다.
그곳에서,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현우의 모습이 보였다. 현우는 거리 한쪽에 서서 카메라를 들고 자유롭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빛나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발견한 듯 셔터를 누르며 거리를 만끽하는 그의 모습. 재하를 발견한 현우가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현우: “어? 오늘은 혼자 걷고 있네요. 회사 일은 끝난 건가요?”
(재하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솔직하게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고 싶었다. 오늘 하루가 자신의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걸 털어놓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와 조용히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재하: (조심스럽게) “현우 씨는… 이렇게 자유롭게 사는 게 괜찮아요? 아무런 계획도, 목표도 없이 그저 순간에 자신을 맡긴다는 게.”
현우: (고개를 갸웃하며) “음, 계획이 꼭 있어야만 하나요? 저는 그저 오늘을 즐기며 살 뿐인데요.”
(현우의 답에 재하는 헛웃음을 지었다.)
재하: “나는 항상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내 삶이 의미가 있다고 느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지거든요.”
현우: (조용히 듣다가) “재하 씨는 모든 걸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건가요?”
재하: (잠시 말을 멈추고) “…그렇다고 생각해왔어요. 내가 노력하고 준비하면, 모든 일이 계획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현우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눈을 바라봤다.)
현우: “하지만 인생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지 않나요? 오히려 계획에 없는 순간들, 예기치 못한 일들이 우리 삶에 의미를 주기도 하고요.”
재하: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그렇게 모든 걸 놓아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은데…”
(현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현우: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 순간을 겪어보는 게 두렵지 않아요. 만약 무너지게 되더라도, 그 무너짐 속에서 뭔가 새로운 게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재하는 그의 말에 깊은 울림을 느꼈다. 그는 항상 자신을 통제하고 억제하며 살아왔지만, 그게 자신을 옥죄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마치… 고요한 감옥 같은 느낌.)
[밤하늘 아래, 서로를 마주 보며]
두 사람은 조용히 길을 걸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고, 하늘에는 희미한 별빛이 비치고 있었다. 현우와 함께 있는 이 순간, 재하는 자신도 모르게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아무 계획도 없이, 그저 오늘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하: (작게 중얼거리듯) “가끔은… 나도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좋겠네요.”
(현우는 그의 말을 들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현우: “그렇게 살아봐요. 재하 씨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예요.”
재하: (눈을 피하며 작게) “하지만… 나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르겠거든요.”
현우: “그럼 더 좋은 이유가 생겼네요. 재하 씨가 진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찾을 기회잖아요.”
(현우의 따뜻한 눈빛이 재하의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다. 그 말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늘 완벽함을 추구하며 살아왔던 재하. 하지만 현우와 함께라면, 조금은 더 자신을 내려놓고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여도 될 것 같았다.)
그는 문득 상상해봤다. 목표와 계획에서 벗어나, 그저 지금의 순간을 즐기는 삶. 그 상상 속에서 그는 진정으로 편안하게 웃고 있었다. 현우와 함께라면, 그는 조금 더 자신을 풀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진짜 자신을 조금씩 꺼내 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