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이후, 재하와 현우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일주일에 몇 번씩 서로의 시간을 내어 만났고, 홍대의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거리의 예술 공연을 보며 함께 시간을 쌓아갔다. 현우와 함께 있을 때면 재하는 이상하게도 더 편안해지고, 세상에 조금 더 솔직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깨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현실과의 충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현우와의 관계가 재하에게 신선한 행복을 가져다줬지만, 이들이 속한 세상은 그 관계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의 난관]
어느 날, 재하는 회사에서 진행 중인 새로운 프로젝트와 관련해 큰 난관에 부딪혔다. 이 프로젝트는 홍대 일대의 대규모 리모델링을 목표로 하는 사업이었다. 오래된 건물들을 정리하고 상업적인 공간으로 재개발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평소라면 재하도 그저 회사의 중요한 업무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수행했겠지만, 이번에는 문제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다.
현우의 예술 공간이 속한 커뮤니티도 이 프로젝트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모여 자율적으로 꾸려가는 이 공간을, 회사는 ‘비효율적’이라 여겼다. 하지만 현우는 그곳을 지키기 위해 지역 예술가들과 함께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현우와의 대화에서 드러난 갈등]
하루는 재하가 그 문제로 인해 머리가 복잡해질 즈음, 현우가 그를 찾아왔다. 현우의 얼굴에는 평소와 달리 진지한 기색이 감돌았다. 그는 테이블 너머로 재하를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현우: “재하 씨도 알죠? 지금 회사가 하려는 프로젝트 때문에, 홍대 커뮤니티가 큰 타격을 입게 될 거라는 거.”
(재하는 잠시 말을 잃고 현우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재하: “…알고 있어. 하지만 이건 회사 차원에서 추진하는 중요한 사업이야. 내가 쉽게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현우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재하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는 실망과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현우: “재하 씨, 당신은 내가 믿는 사람이에요. 당신이 내게 중요한 사람이니까,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선 나를 이해해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거야?”
(재하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평소에는 절대 동요하지 않을 이성적인 판단이, 현우 앞에서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재하: “…현우, 이건 내 일에 대한 책임이기도 해. 내가 맡은 일을 버리고 감정적으로만 행동할 수는 없어.”
현우: “하지만 나는 재하 씨가 누구보다 진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당신이라면 현실을 이유로 나를 외면하진 않을 거라고 믿었다고.”
(현우는 실망을 감추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재하의 마음은 깊게 흔들렸다. 오랜 시간 함께하며 쌓아온 신뢰와 감정이, 이 문제로 인해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고민]
현우가 떠난 후, 재하는 혼자 남아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방식, 철저하게 원칙을 지키며 모든 것을 현실적이고 효율적으로 판단해온 선택들이 과연 옳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모든 것은 효율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한다고 여겼고, 성공을 위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현우와의 관계가 그의 모든 규칙과 원칙을 서서히 흔들고 있었다.
재하: (속으로)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현우와 함께 있으면서 조금씩 변하고 있었던 나 자신이… 틀린 걸까?’
한편으로는 현우를 이해하고, 그가 속한 커뮤니티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재하의 머릿속에 있는 현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회사에서의 성공을 위해 쌓아온 경력, 동료들과의 관계, 그리고 철저히 지켜온 원칙들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며칠 후, 다시 만난 현우]
재하는 그날 이후로 현우를 몇 번이고 만나려 했지만, 현우는 그의 연락을 피하는 듯했다. 겨우 며칠 뒤, 홍대의 작은 카페에서 그를 만난 재하는 묘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현우는 그를 바라보며 여전히 무겁고도 쓸쓸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재하: “현우… 미안해. 네가 실망한 거 알아. 하지만… 나도 내 자리를 지키는 게 쉽지 않아.”
(현우는 재하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현우: “재하 씨는 그 자리에서 행복해요? 회사에서, 성공을 쫓으면서… 그게 정말 당신을 만족시키는 길인가요?”
재하: “그건… 내가 선택한 길이야. 다른 선택을 생각해본 적 없어.”
(현우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현우: “재하 씨, 때로는 선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처음 봤던 재하 씨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감정을 억누르고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보다는, 진짜 자신을 마주하는 사람이라고….”
(재하는 그 말에 마음이 깊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현우는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짜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고 있었다.)
현우: “나… 재하 씨가 변하지 않더라도 당신을 이해할 수 있어요. 다만… 진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원하는지… 그걸 당신 스스로 알았으면 좋겠어요.”
(현우는 조용히 일어나 카페를 나섰고, 재하는 혼자 남아 그의 말을 곱씹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외로운 밤, 진짜 나를 마주하다]
현우와 헤어진 후, 재하는 자신이 살아온 방식과 지금의 감정 사이에서 갈등했다. 회사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해왔던 자신. 하지만 현우를 만난 후 처음으로 그 모든 것이 무너져가는 것을 경험하고 있었다.
재하: (속으로) ‘난… 지금까지 진짜 나를 숨기며 살았던 걸까?’
현우의 말은 그의 가슴 속 깊이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목표와 성취만을 좇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현우와 함께 있는 시간을 통해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자신이 점점 더 그리워지고 있었다.
재하는 스스로에게 처음으로 솔직해지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꿈꾸는지… 그것을 마주하는 데 필요한 용기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