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처럼 병원 근처를 지나가던 현주는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설마…?’
운동복 차림에 흐트러진 머리. 그리고 차가운 분위기 대신 어딘가 편안해 보이는 모습.
맞다. 이진혁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항상 하얀 가운을 입고 냉철한 태도를 유지하던 사람이,
지금은 운동복 차림으로 거리에서 서성이고 있다.
‘뭐야, 사람이었네? 로봇 아니었어?’
그도 그녀를 발견했다. 살짝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김현주 씨.”
“아, 네! 안녕하세요.”
순간, 그와 마주친 게 왜인지 어색해졌다.
병원에서는 언제나 환자와 의사의 관계로 만났지만,
이렇게 병원 밖에서 마주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데 진혁이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저… 이거.”
“네?”
“치료 후 관리법. 다음 주부터 혼자 해야 하니까.”
그제야 현주는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냥 구두로 설명해 주는 게 아니라, 문자로 보내주려고 번호를 받으려는 거였다.
‘근데… 이거 번호 교환하는 거잖아?’
현주는 순간 망설였다.
그냥 단순한 의료 정보 전달일 뿐이지만,
진혁과 번호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어… 네, 그러면….”
살짝 머뭇거리며 자신의 번호를 불러주었다.
진혁은 그것을 차분하게 저장하고,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충치 치료 후 관리법>
- 자극적인 음식 피할 것
- 너무 뜨겁거나 차가운 음식 섭취 금지
- 양치질은 부드럽게
그리고 마지막 줄…
- 문제 생기면 바로 병원 방문.
그 문장을 보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문제 생기면 바로 병원 방문… 이거 너무 차갑고 딱딱한 말투 아닌가?’
현주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이거 너무 딱딱한 거 아니에요? 좀 더 친절하게 써주시면 안 돼요?”
진혁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이게 제일 간결하고 정확한 표현인데요.”
“아니, 그러니까 예를 들면… ‘조심히 관리하시고,
불편하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같은 거요!”
“…….”
진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현주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휴대폰을 다시 만지작거리며 문장을 수정했다.
- 불편하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현주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현주는 정말 그가 바로 수정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우와, 선생님이 이런 말도 할 줄 아시는구나?”
“김현주 씨.”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
“김현주 씨는 애들입니까?”
“…네??”
“치료 후 관리법을 왜 감성적으로 전달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주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기계적인 문장이니까 그렇죠!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의료 지침에서 따뜻함이 필요한가요?”
“당연하죠! 환자 입장에서는요!”
진혁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메시지를 작성했다.
- 치료 후 잘 관리하시고, 불편하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됐습니까?”
현주는 화면을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인간미가 느껴지네요.”
그녀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입가가 아주 살짝 올라간 것 같았다.
이상했다.
진료실에서는 무섭기만 했던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의외로 인간적인 면이 있었다.
게다가…
‘잘생겼네….’
진료실에서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그리고 다른 분위기에서 보니 또 다르게 보였다.
눈매도 또렷하고 턱선도 날렵했다.
병원에서는 날카로운 분위기가 강했지만,
지금처럼 편안한 차림을 하고 있을 때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현주는 재빨리 정신을 다잡았다.
‘아니야. 저 사람은 그냥 나의 담당 의사일 뿐이야. 이상한 감정 가지면 안 돼!’
그러나 진혁이 다시 말을 건네자, 심장은 또 한 번 반응하고 말았다.
“그럼, 다음 치료 때 보죠.”
“…네?”
“신경 치료 아직 다 끝난 거 아닙니다. 남은 일정 있으니까요.”
“…아, 네.”
순간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진혁은 그런 현주를 한 번 스윽 바라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현주는 그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혼잣말을 했다.
“…이상한 사람, 진짜.”
하지만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고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