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약속 장소는 회사 근처의 조용한 카페였다. 하린은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해,
창가 자리에 앉아 윤재를 기다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설렘 반, 긴장 반으로 그를 기다리던 하린은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윤재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린 씨, 많이 기다렸어요?"
윤재는 여전히 차분하고 친절한 미소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하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어요."
둘은 음료를 주문한 후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윤재는 하린을 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하린 씨, 요즘 회사에서 일 많죠? 힘든 건 없어요?"
하린은 그의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네, 조금 바쁘긴 한데 괜찮아요. 선배는요?"
윤재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괜찮아요. 사실 오늘은 하린 씨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하린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혹시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걸까?
"무슨 말씀이신데요?"
하린은 조심스레 물었다.
윤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하린 씨가 팀에 들어오고 나서 분위기가 많이 밝아졌어요. 다들 하린 씨를 정말 좋아해요."
그의 예상 밖의 칭찬에 하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게... 감사합니다. 선배가 잘 챙겨주셔서 그래요."
"저도 하린 씨가 팀에 있어줘서 든든해요. 앞으로도 좋은 관계로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의 말은 따뜻했지만, 하린이 기대했던 답은 아니었다.
그녀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윤재는 그녀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동료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하린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 뒤에는 실망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를 나서면서 윤재는 말했다.
"하린 씨, 오늘 나와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하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선배도요."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 하린은 밤거리를 걸으며 자신에게 실망했다.
'왜 이렇게 기대했을까? 윤재 선배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다음 날, 회사에서 하린은 태우와 마주쳤다.
태우는 그녀를 보자마자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윤재 선배랑 만났죠? 잘 됐어요?"
하린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동료끼리 밥 먹은 거예요."
태우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렇게 시무룩해 보여요? 윤재 선배가 실수라도 했어요?"
하린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태우는 그녀를 따라오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린 씨, 이제 그만 선배한테 마음 쓰는 게 어때요?"
그의 말에 하린은 걸음을 멈췄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태우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윤재 선배가 하린 씨를 특별히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 하린 씨도 알고 있잖아요."
하린은 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태우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그날 저녁, 하린은 집에서 홀로 앉아 태우의 말을 곱씹었다.
윤재와의 만남은 그녀에게 기대감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태우는 그런 그녀를 거침없이 지적하며 또다시 혼란에 빠뜨렸다.
하린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정말 윤재 선배를 좋아하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그저 다정한 누군가가 필요했던 걸까?'
그녀의 마음속에는 태우와 윤재라는 두 남자가 미묘하게 얽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