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은 공모전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디자인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책상 위에는 다양한 스케치와 원단 샘플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펜을 쥔 채 디자인을 수정하다가 시계를 힐끗 보았다.
어느새 밤 열한 시가 넘었다.
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윤이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거실을 지나 작업실로 향했다.
문을 살짝 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작업 중이에요?"
소은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작업실에 들러 안부를 묻곤 했다.
"네, 마감이 얼마 안 남아서요."
도윤은 책상 위의 스케치들을 바라보았다.
지난번보다 더 정교해진 디자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을 컬렉션이라는 주제에 맞게 다양한 색감과 스타일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계속 이렇게 밤을 새우면 몸 상해요."
소은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도윤은 대답 대신 책상 위에 놓인 물병을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
"물이라도 마시면서 해요."
소은은 그가 조용히 챙겨주는 모습에 살짝 당황했다.
처음 계약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제는 마치 자연스럽게 서로를 신경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이제 조금만 더 하고 잘게요."
도윤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문이 닫힌 후에도 소은은 한동안 그가 건넨 물병을 바라보았다.
계약 관계임을 잊지 않으려 했지만, 점점 일상이 뒤섞이고 있었다.
강 회장은 최근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언론의 관심도 줄어들고, 기업 이미지 상승 효과도 점차 약해지는 듯했다.
그는 비서를 통해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강도윤, 요즘 너무 조용하군."
강 회장은 도윤을 서재로 불러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버지를 마주했다.
"별일 없습니다."
"별일 없긴. 네가 결혼을 했으면 좀 더 자연스럽게 보여야 하는데,
언론에서는 너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
사람들이 점점 흥미를 잃고 있다."
강 회장은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도윤을 노려보았다.
"우연히라도 좋으니, 함께 있는 사진이 나올 수 있도록 해.
사람들이 네 결혼을 진짜라고 믿게 말이야."
도윤은 눈을 가늘게 뜨며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결국 그는 이 결혼을 이용해 기업 이미지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도윤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여전히 불쾌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짧게 대답하고 자리를 떠났다.
며칠 후, 도윤은 소은에게 저녁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공모전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오늘은 좀 쉬는 게 어때요?"
도윤이 말했다.
소은은 고민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두 사람은 도윤이 예약한 고급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분위기 좋은 창가 자리에 앉자마자, 몇몇 기자들이 슬쩍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이거… 혹시 일부러 기자들을 부른 거예요?"
소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윤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우리 관계를 의심하고 계세요. 우리가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해야 합니다."
소은은 그의 의도를 이해했지만, 왠지 모르게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계약 관계지만, 이런 식으로 공개적인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도윤은 기자들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소은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불편함이 스며 있었고,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듯한 눈빛이 담겨 있었다.
그녀도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으며 그의 연기에 동참했다.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도윤은 그녀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신경 써서 골랐다.
둘은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처음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서자, 몇몇 기자들이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도윤은 자연스럽게 소은의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보호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긴장했지만, 그가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손길이 어색하지 않았다.
다음 날, 언론에는 두 사람의 저녁 식사 사진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여전히 달콤한 신혼생활'이라는 제목과 함께,
도윤이 소은을 다정하게 챙기는 모습이 기사화되었다.
강 회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기업 이미지는 다시 상승했다.
그러나 소은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계약이지만, 이 모든 것이 점점 현실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거래라고 생각했지만,
도윤이 보여주는 작은 배려와 다정함이 가끔은 그녀를 흔들리게 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