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도윤은 무심코 차를 몰고 가던 중, 낯익은 거리에 다다랐다.
시선을 돌리자 한적한 골목 끝에 자리한 작은 공원이 보였다.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울리는 듯한 기분에, 그는 차를 멈추고 천천히 문을 열고 내렸다.
그곳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자주 오던 공원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단 한 번도 발걸음을 들이지 않았던 곳.
그런데도 오늘따라 이상하게 그곳으로 끌려왔다.
공원 한쪽에 놓인 낡은 벤치. 어릴 적 어머니가 늘 앉아 있던 자리였다.
도윤은 그곳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어머니라면 이런 내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하셨을까.’
소은과 함께한 시간들이 떠올랐다.
공모전에서 수상한 그녀의 환한 미소, 자신을 향해 건네던 감사의 말들.
그리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모습까지.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스스로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질투라도 하는 건가.”
작게 중얼거린 말에 자신이 놀랐다.
아니, 그럴 리 없었다. 그럴 자격도 없었다.
그녀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묘한 상실감을 느끼는 자신이 싫었다.
도윤은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가까운 바를 찾았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었지만, 잔을 기울일수록 과거의 기억들이 또렷해졌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꿋꿋이 감내하며 살던 모습.
그리고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손길.
그런 어머니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술잔을 몇 번이나 비웠는지 모를 정도로 마신 후, 그는 결국 다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겨우 집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한밤중이었다.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
소은이 아직 깨어 있는 듯했다.
도윤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휘청였다.
그 순간, 깜짝 놀란 소은이 다가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도윤 씨, 괜찮아요?”
술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고,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시고 오면 어떡해요.”
소은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도윤은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신경 쓰지 마요.”
힘없이 대꾸한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은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주방으로 가 물 한 잔을 가져왔다.
“이거라도 마시고 주무세요.”
도윤은 한참을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기대고 싶은 무언가를 찾은 듯한 눈빛이었다.
그는 물을 한 모금 삼키고 나직이 말했다.
“어머니와 자주 갔던 곳이 있어요.”
소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오늘… 우연히 그곳에 갔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곳인데… 그곳에 가니까,
내가 얼마나 한심한 놈인지 깨닫게 되더군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나직했다.
“나는 늘 어머니를 지켜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소은은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강하고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사실 그 안에는 깊은 외로움과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도윤 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도윤은 작게 웃었다.
“당신은 그렇게 말하겠죠. 하지만, 난 항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 같아요.”
소은은 무슨 의미인지 묻고 싶었지만, 조용히 그를 지켜보았다.
그때, 도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소은 씨…”
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묘하게 달라졌다.
그는 술에 취한 상태였지만, 정신은 또렷해 보였다.
소은은 숨을 삼켰다.
그의 눈빛은, 마치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했다.
그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았다.
부드러운 키스였다.
깊이 파고들지도 않았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천천히 다가온 순간이었다.
소은은 순간적으로 멈춰버렸다.
도윤의 온기가 가까워지는 것이 실감 났고,
가슴 속 깊이 숨어 있던 감정들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 순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키스가 끝난 후, 도윤은 이내 천천히 몸을 물렸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한 행동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미안합니다.”
그는 짧게 말했다.
소은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저….”
그가 입을 열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어지러운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소은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도윤은 조금 늦게 일어났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무엇보다도, 어젯밤의 일이 뚜렷이 기억났다.
그는 천천히 거실로 나왔다.
소은이 주방에서 조용히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제와는 다른 차가운 담담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제….”
소은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술김에 저지른 실수라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도윤은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그렇게 오해해 주는 것이 편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맞는 선택일지도 몰랐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소은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그날 밤의 기억은 누구에게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