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서울의 밤,
낡은 고시원 건물은 도시의 소음에서 동떨어진 듯 고요했다.
삐걱거리는 복도를 지나, 3평 남짓한 좁은 방, 박소은은 희미한 형광등 아래
낡은 책상에 앉아 디자인 스케치에 몰두하고 있었다.
닳아 해진 팔꿈치와 연필 끝에 묻은 검은 흑연만이
그녀가 얼마나 오랜 시간 그림을 그렸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방은 마치 하늘 아래 놓인 작은 그림자 같았다.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방 안은 그녀의 고독을 더욱 부각시키는 듯했다.
얇은 합판으로 겨우 막아 놓은 벽 너머 방의 소음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소은은 오직 스케치북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소은의 방은 그녀의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벽지는 군데군데 뜯어져 있었고,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찬 바람은 얇은 담요 한 장으로는 막기 어려웠다.
겨울의 끝자락,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소은은 몇 겹의 옷을 껴입었지만,
스며드는 냉기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소은의 눈빛은 그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강인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디자인이라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현실의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빚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었지만,
그것마저도 그녀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빚의 무게는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그녀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드리우는 것처럼.
소은의 머릿속에는 3년 전 그날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벚꽃이 만개했던 봄날,
가족들과 함께 떠났던 짧은 여행은… 마지막 날이었다.
낡은 승용차 안, 소은은 창밖으로 펼쳐진 벚꽃 터널을 바라보며 행복에 젖어 있었다.
부모님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차 안에는 따뜻한 온기와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돌아오는 길, 굽이진 산길을 달리던 차는 갑자기 마주 오던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끔찍한 굉음과 함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뒤엉켰다.
소은은 정신을 잃기 직전, 자신을 감싸 안은 아버지의 따뜻한 품을 마지막으로 기억했다.
그 따뜻함은 마치 마지막 행복의 조각처럼 그녀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눈을 떴을 때, 소은은 하얀 병실 천장을 마주하고 있었다.
온몸은 붕대로 감겨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낯선 약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 것은 간호사의 입에서 나온 짧은 한마디였다.
"보호자분들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소은의 세상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녀를 지탱해주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부모님의 따뜻한 미소,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들, 모든 것이 한순간의 악몽처럼 사라져 버렸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그녀의 세상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식되었다.
그녀는 환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림자와 같았다.
병원에서 퇴원한 소은에게 남은 것은 부모님이 남긴 빚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보험금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치료비와 장례비로 인해 빚은 더욱 늘어났다.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작은 옷 가게는 이미 빚 때문에 담보로 잡혀 있었고,
결국 경매에 넘어가고 말았다.
소은은 대학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낮에는 카페에서 서빙을 하고, 밤에는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빚을 갚아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빚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그림자를 쫓아오는 것처럼, 빚은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소은 씨, 잠깐만요!"
복도에서 들려오는 고시원 주인의 목소리에 소은은 현실로 돌아왔다.
굳은 표정의 주인은 손에 두툼한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 봉투는 마치 사형 선고와도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또… 인가요?"
소은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여러 번 겪었던 빚 독촉의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 달 월세도 밀리셨죠?
게다가… 전에 말씀드렸던 빚 문제도 그렇고… 더 이상은 기다려 드릴 수 없습니다."
주인의 말은 차갑고 단호했다.
소은은 봉투를 받아 들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봉투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현실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절망이라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치 하늘이 더욱 낮게 내려앉은 것처럼, 그녀의 시야는 어두워져만 갔다.
봉투 안에는 빚 독촉장과 함께 퇴거 명령서가 들어 있었다.
부모님이 남긴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가려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상황이었다.
소은은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텅 빈 방 안에는 그녀의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녀의 작은 방은 이제 그녀를 보호해 줄 수 없는, 텅 빈 그림자와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공간마저 그녀를 배신한 것이다.
책상에 엎드린 소은은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을 터뜨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소리만이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부모님을 잃은 슬픔에 이어 빚더미에 짓눌려 희망조차 잃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그녀의 하늘 아래, 한 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는 듯했다.
마치 세상에서 홀로 남겨진 그림자처럼 외롭고 고통스러웠다.
그녀의 그림자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마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그림자와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함만이 그녀를 덮쳐왔다.
그렇게 그녀는 울고 또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