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은 강의실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평소처럼 강의에 들어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지만, 요즘 들어 캠퍼스가 낯설게 느껴졌다.
공모전 수상 이후,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익숙했던 동기들의 시선은 이제 의심과 경계로 가득 차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몇몇 학생들이 그녀를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모른 척하고 지나쳤겠지만, 오늘따라 그 말들이 유난히 귀에 박혔다.
"결국 강도윤의 아내라서 된 거 아냐?"
"그러게, 우리 같은 일반 학생이랑은 비교가 안 되지."
"처음엔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
소은은 그 말들이 모두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걸음을 옮겼다.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 노트를 펼쳤지만,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후, 평소 자주 어울리던 동기들이 그녀를 슬쩍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다가가려 하면 어색한 미소를 짓거나, 말을 돌렸다.
공모전이 발표되던 날만 해도 축하해주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논란이 커지면서 그들의 태도도 변해갔다.
그중 한 명인 유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소은아,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
소은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복도 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진은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정말 널 축하해주고 싶었어. 근데… 솔직히 말하면 우리도 기회가 있었던 거잖아.”
소은은 유진의 말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근데 네가 강도윤 씨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아무래도 우린 비교조차 안 되는 거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게 공정한 경쟁이었을까?”
그 말이 끝나자, 소은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네가 정말 실력으로 붙은 거라 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 거야.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도 네가 너무 부러워.”
유진의 말은 원망이라기보다는 솔직한 감정 토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말이 소은에게는 더 큰 무게로 다가왔다.
"너는 취업 걱정할 필요 없잖아. 어차피 강도윤 씨가 있잖아. 우리랑은 다르니까."
그 말이 결정타였다.
소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취업이 어려운 현실에서, 그녀만은 걱정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 역시 아무런 노력 없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진아, 나도 열심히 했어."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난 단 한 번도 도윤 씨의 도움을 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고, 내 힘으로 여기까지 오고 싶었어."
유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안 봐. 미안해,
나도 기분 상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솔직한 감정을 말한 거야."
소은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해해."
그녀는 정말로 유진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도윤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소은이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무슨 일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도윤은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뭔가 신경 쓰이는 게 분명했다.
“말해요.”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공모전 때문에 학교에서 조금… 복잡한 일이 있었어요.”
도윤은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가 뭐라고 했어요?”
그의 목소리가 단호해지자, 소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럴만한 상황이었어요.”
도윤은 그녀의 반응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소은은 "이건 내 문제예요."라며 거리를 두었다.
도윤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혼자 해결할 필요 없어요. 나도 함께할 수 있어요."
소은은 애써 미소 지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여전히 무거운 감정이 남아 있었다.
소은은 홀로 작업실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새하얀 스케치북이 놓여 있었지만, 손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머리로는 이해하려고 해도,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감정들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억울하다는 감정보다 허탈함에 가까웠다.
분명 모든 과정을 정당하게 거쳤다.
남들보다 더 노력했고, 밤을 새워가며 디자인을 다듬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노력보다 그녀의 배경을 먼저 보았다.
"강도윤의 아내니까 당연히 수상했겠지."
"우리는 시작부터 비교도 안 되는 상대였던 거야."
그런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처음엔 무시하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짓누르는 듯했다.
소은은 손끝으로 스케치북의 가장자리를 가볍게 문질렀다.
디자인을 구상할 때면 늘 가슴이 뛰었고, 스케치를 완성할 때면 성취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이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퍼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작게 내뱉은 말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왔지만,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손가락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머릿속이 복잡할수록 손끝이 무거워졌다.
다시 펜을 잡아야 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그리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