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은 조용히 자신의 짐을 정리했다.
작업실 한쪽에 놓여 있던 스케치북과 책들, 그리고 몇 벌 안 되는 옷들.
이곳에서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어느새 그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서랍을 정리하다가 손에 잡힌 작은 액자 속에는,
도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액자를 들었다.
도윤이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고,
그 옆에서 그녀가 미소 짓고 있는 모습.
이 사진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서로에게 감정을 가지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소은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곧, 그 사진을 서랍 깊숙이 넣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미련을 가져선 안 되니까.
그때, 집으로 돌아온 도윤이 거실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소은은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도윤 씨, 저 짐 다 쌌어요."
도윤은 테이블 위에 놓인 여행 가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 감춰진 무언가가 느껴졌다.
소은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떠나기 전에 인사드리고 가려고요."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손끝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야겠죠."
그는 차분한 얼굴을 유지하려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소은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 순간이 오기까지, 둘은 너무 많은 것들을 함께했다.
그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를 위해 떠나려 한다.
서로를 위해 하는 선택인데도, 이렇게까지 아플 줄은 몰랐다.
"이제, 가볼게요."
소은은 조용히 돌아서서 문을 향했다. 도윤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붙잡고 싶었다. 그녀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그녀를 붙잡으면, 그녀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녀가 떠날 수 있도록 보내주는 것뿐이었다.
"……잘 지내요, 소은 씨."
도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소은은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뒤돌아보지 않았다.
"……네, 도윤 씨도요."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공항의 대합실은 분주했다.
소은은 짐을 맡기고 비행기 티켓을 확인하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곧 비행기 탑승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도윤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이 그녀가 떠나는 날이라는 걸. 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모를 허전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때,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소은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도윤이었다.
그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소은도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소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윤 씨."
그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다.
그녀가 떠나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소은은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려 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천천히, 탑승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도윤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소은이 게이트를 지나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도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를 위해 떠난 두 사람의 첫 번째 사랑은, 그 자리에서 끝이 났다.
하지만, 정말로 끝난 것일까?
도윤은 멍하니 탑승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타고 있는 비행기가 이륙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 도윤은 처음으로 확신했다.
그녀가 없는 삶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공허할 것이라는 걸.
그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회사를 떠난 이유는 그녀였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결국,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다.
그녀가 떠난 후에도,
공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도윤의 세계는 멈춰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는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조용히 뒤돌아섰다.
그리고 느꼈다.
이별이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이 사랑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 없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