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희가 밝은 얼굴로 다가와 윤이나의 손을 잡았다.
“언니, 정말 괜찮아? 갑자기 연락도 없이 사라지고… 걱정했잖아.”
이나는 동생의 손을 꼭 잡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동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가볍게 했지만,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깨닫고 있었다.
‘재희는 살아남았어.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손목에 새겨졌던 문양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묘한 감각, 그리고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 낯선 느낌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언니?”
재희의 부름에 이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재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리하지 마. 언니, 요즘 좀 이상해 보여.”
이나는 재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팠다.
동생을 위해 모든 걸 포기했지만, 이제는 그 곁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카페 한쪽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서재현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문양을 끊어냈군요.”
재현은 조용히 걸어와 그녀의 앞에 섰다.
그의 눈빛은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괜찮아요. 제 동생을 살렸으니까요.”
재현은 고개를 저으며 낮게 말했다.
“그 선택으로 당신은 이제 시간이 멈춘 사람이 됐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이 세계의 흐름과 맞지 않게 되었어요.”
이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시간이… 멈췄다고요?”
재현은 그녀의 손목을 가리켰다.
“당신의 시간은 이제 이곳과 다르게 흐를 겁니다. 주변 사람들은 늙고 변해가지만, 당신은 그 흐름에서 벗어나게 되죠.”
이나는 그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럼… 나만 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당신이 선택한 대가입니다. 문양을 끊어내면서 당신의 영혼은 시간의 흐름과 분리됐습니다.”
윤재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 무슨 얘기야? 무슨 시간이 멈췄다는 거야?”
이나는 동생의 얼굴을 보며 눈물이 고였다.
‘내가 지켜낸 건 재희의 삶이지만, 이제 재희와 함께할 시간은 점점 줄어들겠지.’
그녀는 손을 내밀어 재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꿈 같은 얘기일 뿐이야.”
하지만 재희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언니, 뭔가 숨기고 있지? 그동안 많이 달라졌어. 예전엔 이렇게 우울한 얼굴을 한 적이 없었잖아.”
이나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재희에게 모든 진실을 말할 수는 없어. 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을 소중히 해야 해.’
재현은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말을 이었다.
“윤이나 씨.”
이나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이제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시간이 멈춘 당신은 더 이상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이나는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그럼… 내가 이제 뭘 해야 하죠?”
재현은 그녀를 깊이 바라보았다.
“당신은 여전히 죽음을 조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강요되는 계약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 될 겁니다.”
이나는 그의 말을 듣고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문양은 사라졌지만, 그녀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죽음을 조율한다고요…?”
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당신이 선택한 길은 사람들에게 고통 없는 마지막을 선물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윤재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언니를 바라봤다.
“언니… 괜찮은 거지?”
이나는 재희를 꼭 안으며 속삭였다.
“그래. 난 괜찮아.”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시간은 이미 이 세계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윤이나는 재희를 꼭 껴안으며 다짐했다.
‘이제 내가 선택한 모든 길은 내 책임이야.’
재현은 마지막으로 이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지금부터 새로운 중개자가 됩니다. 하지만 당신의 방식대로 하세요.”
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내가 선택하는 방식으로 해볼게요.”
윤이나는 재희를 꼭 안은 채 고개를 들었다.
동생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지만, 이나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재희와 같은 시간 속에 살 수 없어.’
재현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당신은 이제 시간이 멈춘 사람입니다.”
그 의미를 곱씹을수록 이나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실감하고 있었다.
문양을 끊어내고 계약에서 벗어났지만, 대가는 너무나도 혹독했다.
“재희야.”
이나는 재희의 손을 잡았다.
“언니는 이제 떠나야 할 것 같아.”
재희는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떠나다니? 어디로?”
이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슬프게 일그러져 있었다.
“멀리 가서… 나만의 시간을 좀 가져야 할 것 같아.”
재희는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 혼자 두고 어디 간다는 거야? 무슨 일이 있는 거지?”
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마 모든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시간을 벗어난 존재가 되었다는 걸 말할 수는 없어. 재희가 그걸 알면 나를 붙잡으려고 할 테니까.’
재희는 이나의 침묵에 초조해졌다.
“언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솔직하게 말해줘. 내가 도와줄게.”
이나는 동생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재희야, 넌 이제 더 이상 날 걱정할 필요 없어. 난 괜찮아. 그리고…”
그녀는 재희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내 유일한 바람이야.”
재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그럼 언니는… 행복하지 않아?”
이나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행복해질 거야. 이제 내가 선택한 길을 걸어갈 테니까.”
그날 밤, 윤이나는 조용히 짐을 챙겼다.
서재현은 카페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떠나는군요.”
재현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이 문양을 끊어냈지만, 그 여파는 영원히 남을 겁니다. 시간이 멈춘 당신은 앞으로도 수많은 죽음과 마주하게 될 겁니다.”
이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왜 내가 이런 선택을 하도록 내버려 둔 거죠?”
재현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바로 당신이 스스로 찾아야 할 답이니까요.”
그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제 당신은 새로운 중개자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방식대로 그 길을 걸어가세요. 그것이 당신의 운명입니다.”
이나는 그의 손을 잡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말하는 운명은 이제 상관없어요. 앞으로는 내가 선택하는 대로 살 거예요.”
재현은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당신의 새로운 길을 응원하죠.”
윤이나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카페를 나섰다.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했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내 시간이 멈췄다고 해도 괜찮아. 앞으로 내가 선택하는 모든 걸 책임질 거야.’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윤재희와 함께했던 카페는 이제 과거가 되었고, 이나는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몇 년 후.
어느 도시에 위치한 작은 카페.
그곳에 윤이나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목에는 문양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때 한 남자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기 커피 한 잔 주세요.”
이나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블랙으로 드릴까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블랙이면 충분합니다.”
그의 얼굴은 익숙한 듯 낯설었고, 눈빛은 깊은 어둠을 담고 있었다.
이나는 커피를 내리며 속삭였다.
“죽음을 조율하는 중개자가 되더니, 또 새로운 손님을 만나는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내가 선택하는 죽음은 내가 책임진다.’
윤이나는 시간이 멈춘 채 새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이제 그녀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길에서 더 많은 죽음과 삶의 이야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