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훈은 카페에서 일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이상하게도,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특히 한수경이 찾아오는 날이면 더욱 그랬다.
그녀가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읽거나 조용히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수경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기억을 되찾으려 애쓰기보다는,
지훈과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무리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그저 지훈이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곁에 머물렀다.
“서지훈 씨, 오늘은 어떤 커피가 가장 맛있나요?”
수경의 물음에 지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오늘은 라떼가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럼 오늘은 라떼로 할게요.”
수경은 익숙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왜인지 모르게, 그녀와 대화하는 시간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수경은 조심스러웠다.
지훈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서도
그와 자연스럽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녀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지훈을 바라보았다.
때로는 책을 읽는 척하면서 그의 움직임을 살폈고,
때로는 그가 바쁜 틈을 타서 가볍게 말을 걸었다.
“서지훈 씨, 여기 커피가 정말 맛있어요.”
지훈은 컵을 닦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행이네요. 커피 취향이 까다로우신 줄 알았는데.”
수경은 살짝 웃으며 컵을 감싸 쥐었다.
“예전엔 몰랐는데, 이제는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참 좋아졌어요.”
그녀의 말에 지훈은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경은 기억을 되찾아달라고 재촉하지 않았고,
그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단지 그가 있는 이 공간을 자연스럽게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하루는 비가 내렸다.
창밖을 바라보던 수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훈은 그녀를 흘끗 보더니,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비 오는 날은 싫어하세요?”
수경은 창밖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히려 좋아해요. 그런데, 이런 날이면 괜히 감성이 더 풍부해지는 것 같아요.”
“감성?”
“네. 예전엔 비 오는 날이면,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창가에서 커피 마시곤 했거든요.”
지훈은 무심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아련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 순간, 그의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찌릿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감각이었지만, 익숙한 듯한 감정이었다.
수경은 그의 시선을 느끼고 부드럽게 웃었다.
“서지훈 씨도 비 오는 날 좋아하세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자신도 누군가와 함께 창가에 앉아 있던 기억.
하지만 그 얼굴은 흐릿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수경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녀가 카페에 들어올 때마다 무심코 시선을 주었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면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녀가 없는 날이면, 왠지 모르게 허전함을 느꼈다.
어느 날, 수경이 평소보다 늦게 카페에 왔다.
지훈은 그녀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저녁 무렵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안도하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늦으셨네요.”
지훈은 무심한 척 물었다.
수경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제가 안 왔으면… 기다리셨을까요?”
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자신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했다.
수경은 그의 반응을 보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저도 서지훈 씨가 없으면 허전할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지훈의 심장이 묘하게 뛰었다.
그는 무언가를 떠올리려 애썼다.
이 감정이, 이 익숙한 따뜻함이… 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하지만 기억은 흐릿했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한수경이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조용히 스며들고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