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하는 마을에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해솔을 마주칠 기회는 없었다.
일부러 예전의 장소를 찾아다녔지만 그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개울가, 오래된 놀이터, 동네 책방까지—
모든 곳이 예전과 다름없었지만 해솔만이 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둘이 자주 갔던
언덕 위 작은 정자를 찾아갔다.
마치 시간은 멈춰 있는데, 그녀만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도시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재하는
점점 마을의 공기와 다시 동화되고 있었다.
밤이면 벌레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고,
아침이면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눈을 떴다.
낡은 골목을 걸을 때마다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해솔과 함께 자전거를 타던 길,
비 오는 날 뛰어가며 물웅덩이를 밟던 순간,
그리고 함께 별을 세던 밤.
그러던 어느 날, 재하는 어릴 적 추억이 깃든 개울가를 찾았다.
바람이 살랑이며 수면 위에 작은 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돌을 주워들고 물수제비를 뜨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해솔아… 넌 지금 어디 있을까."
언덕 위 작은 정자에 도착하자, 재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곳은 어릴 적 해솔과 함께 숨바꼭질을 하며 비밀을 나누던 곳이었다.
나무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재하야!”
재하는 얼어붙었다. 조심스럽게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5년 동안 애타게 그리워했던 얼굴을 마주했다.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정자의 한쪽,
벤치 옆 작은 철제 창고 앞에 해솔이 조용히 서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해솔은 그대로였다.
아니, 어쩌면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고,
익숙한 미소가 입가에 번져 있었다.
재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수없이 꿈꾸던 장면이 현실이 되자 오히려 현실감이 사라지는 듯했다.
해솔은 조심스레 한 걸음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짧은 인사였지만, 그 안에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가 느껴왔을 그리움과 미련, 그리고 다시 마주한 기쁨까지.
재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오랜만이야. 강해솔.”
햇살이 부서지는 강가 옆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둘 사이에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 정적조차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은 이야기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어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언제 돌아왔어?”
해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얼마 안 됐어. 방학 동안 여기 머물게 됐어.”
해솔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오래 머물 수 있는 거네?”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래 있을 거야.”
해솔은 잠시 재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 사실… 가끔 네가 돌아올 것 같았어. 그
래서 여기 올 때마다 네가 있을 것 같아서 둘러보곤 했어.”
재하는 놀란 듯 해솔을 바라보았다.
“정말?”
해솔은 부끄러운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바보 같지?”
“아니, 나도 그랬어.”
재하는 웃으며 말했다.
“나도 가끔 네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날 것 같았어.”
그 말에 해솔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강물 위로 춤추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해솔이 벤치 옆 철제 창고로 걸어갔다.
그 안에는 낡은 담요와 몇 개의 상자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해솔은 익숙한 듯 담요 하나를 꺼내 털었다.
서로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재하는 해솔에게 왜 말없이 떠났느냐고 묻지 않았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가슴속에 남아 있던 질문이었지만,
막상 다시 만난 순간 그 질문은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다시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다시는 연락 끊기지 말자.”
재하는 해솔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해솔은 그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렇게, 5년간 멀어졌던 두 사람은 다시 서로의 자리로 돌아왔다.
햇살이 반짝이며 두 사람을 감쌌다.
강바람이 살랑이며 오래된 기억을 스쳐 지나갔다.
재하는 손을 맞잡은 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해솔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더 좋은 사이가 될 거야.”
그 순간, 먼 하늘 어딘가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오래 묻어 두었던 감정이 서서히 날개를 펴는 듯했다.
둘은 천천히 걸으며 다시 함께했던 장소들을 돌아보기로 했다.
오래된 놀이터, 조그만 책방, 함께 소원을 빌었던 개울가까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억이 선명해졌다.
“여기, 기억나?”
해솔이 오래된 벤치를 가리켰다.
“당연하지. 우리 여기서 밤늦게까지 이야기했었잖아.”
둘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오래전처럼 별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밤하늘이 천천히 어둠을 드리우고, 별들이 하나둘 빛을 내기 시작했다.
어릴 적처럼, 아니 그보다 더 깊은 감정을 안고,
두 사람은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재하는 해솔의 손을 살며시 꼭 잡았다.
해솔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햇살이 머물던 순간은 두 사람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그날 밤, 재하는 오랜만에 해솔과 함께 그 아지트에서 별을 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