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서서히 힘을 잃고,
나뭇잎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매미 소리는 여전히 울렸지만, 어딘가 모르게 낮보다 잔잔하게 들렸다.
해가 지기 전, 온 마을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시간이 오고 있었다.
늘 먼저 달려와 재하의 팔을 끌어당기던 해솔이 요즘 들어 조용해졌다.
개울가에서 물수제비를 뜨던 날도,
오래된 나무 그네에 앉아 발을 흔들던 날도,
해솔은 멍하니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예전 같으면 먼저 장난을 걸며 깔깔 웃었을 텐데,
요즘의 해솔은 가만히 재하를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너 요즘 왜 그래?"
재하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둘만의 아지트인 골목길 담벼락 앞이었다.
해솔은 벽돌 사이로 삐죽 자란 풀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냥... 생각이 좀 많아서."
"무슨 생각?"
"음... 그냥."
재하는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내 비밀이야! 궁금해?" 하며 일부러 궁금증을 유발하던 해솔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목소리도 조용했고, 표정도 어딘가 낯설었다.
"뭔데? 나한테 말해 봐."
해솔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가끔 생각해. 언제까지 이렇게 함께할 수 있을까 하고."
재하는 피식 웃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 넌 그런 생각 안 해?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것들에 대해서."
재하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들썩였다.
"난 지금이 좋은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하지만 해솔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벤치에 앉아 신발 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재하는 그녀의 옆에 앉으며 살짝 어깨를 부딪쳤다.
"뭔가 걱정되는 거야?"
해솔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칼을 살짝 흩뜨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재하는 해솔과 함께하는 순간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함께 있었지만,
해솔은 예전처럼 먼저 손을 잡지도, 앞장서서 뛰어가자고 하지도 않았다.
학교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던 걸음도 어느 순간부터는
멀찍이 뒤에서 걸어오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내렸다.
빗방울이 땅을 두드리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흙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재하는 우산을 쓰고 집으로 가던 중, 벤치에 앉아있는 해솔을 발견했다.
비에 젖은 교복 소매를 쥐고 있는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게 보였다.
"해솔아."
재하는 망설이며 그녀의 곁으로 갔다. 해솔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딘가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 계속 이렇게 있을 수 있을까?"
재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어색해서 장난처럼 넘겨버렸다.
"매번 무슨 소리야. 당연히 계속 이렇게 있지."
하지만 해솔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빗속에서도 선명한 눈동자가, 어딘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재하는, 그날 이후로 해솔을 더욱 신경 쓰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해솔은 더욱 조용해졌다.
수업 중에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고,
점심시간이 되면 혼자 조용히 밥을 먹으려 했다.
재하는 그런 해솔을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손끝에서 모래알이 흘러내리는 듯한,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해솔아, 방과 후에 같이 가자."
어느 날 재하가 일부러 해솔의 책상에 다가가 말했다.
그러나 해솔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미안, 오늘은 먼저 가볼게."
그 말이 왠지 멀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먼저 달려와 재하의 팔을 잡아끌던 해솔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재하는 그날 밤, 천장을 바라보며 잠들지 못했다.
해솔이 왜 그렇게 변했는지,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물어보면 될 것 같은데도,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라도 해솔이 싫어할까 봐, 더 멀어지면 어쩌나 싶어 망설여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해솔과의 시간이, 서서히 무언가 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