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이 지나도, 재하는 여전히 해솔과의 기억 속에 살고 있다.
계절이 바뀌고, 주변의 모습도 변해갔지만,
해솔과 함께했던 곳들은 그대로였다.
비밀 장소, 여름방학을 함께한 강가, 운동장.
그곳에는 해솔이 남긴 작은 흔적들이 있었다.
운동장의 모래밭 한쪽에는
해솔이 이름을 새겨 놓은 작은 돌멩이가 남아 있었고,
오래된 공터의 나무 아래에는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작은 표식이 있었다.
재하는 그곳에 가만히 서서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여기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해솔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해솔이 떠날 걸 알았다면, 더 많이 웃어줬을 텐데.
더 오래 붙잡았을 텐데.
재하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해솔이 없는 이곳에서, 그는 여전히 해솔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비밀 장소에 남겨진 기억
재하는 천천히 그곳을 걸었다.
예전처럼 해솔이 먼저 앞장서서 뛰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때처럼 바람은 여전히 부드럽게 불어왔다.
나무 아래 남겨진 작은 흔적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벤치 위에는 예전에 둘이서 새겨 놓은 작은 낙서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우리, 나중에도 여기서 만나자.”
해솔이 그때 웃으며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단순한 약속이었다.
어린 마음에 ‘나중’이라는 것이 영원할 것만 같았고,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나중’이라는 시간은 너무 빨리 찾아왔고,
그 순간은 되돌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재하는 벤치에 앉아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반짝이며 떨어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지만,
마치 해솔처럼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진 기분이었다.
재하는 강가를 찾았다.
여름이면 해솔과 함께 발을 담그고 물수제비를 뜨던 곳이었다.
바위 위에 앉아 강물 위로 돌을 던져 보았다.
둥글게 튀어 오르던 물수제비는 어느새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해솔이 환하게 웃으며 돌을 던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재하야, 너는 왜 이렇게 진지해?”
해솔이 웃으며 했던 말이었다.
재하는 그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게 넘겼지만,
지금 와서야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해솔은 언제나 순간을 즐겼고, 매일을 특별하게 만들 줄 알았다.
하지만 재하는 늘 조용히 따라가기만 했다.
강물 위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며 재하는 작게 중얼거렸다.
“해솔아, 너라면 지금도 웃고 있겠지?”
강물은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해솔이 없어진 공간에서 재하는 해솔의 흔적을 좇고 있었다.
운동장, 그리고 그날의 기억
학교 운동장 한쪽에는 여전히 오래된 축구 골대가 남아 있었다.
해솔과 함께 공을 차며 뛰놀던 곳이었다.
재하는 운동장을 천천히 걸으며 그날을 떠올렸다.
여름날, 해솔이 잔뜩 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재하야, 너 너무 느려!”
해솔은 언제나 앞장서 뛰어다녔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며 따라가던 재하는
한 번도 그것이 멀어진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
지만 이제는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거리에 있었다.
운동장 한쪽에 남겨진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그 아래, 해솔이 예전에 숨겨둔 쪽지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쳤다.
“나중에 다시 와서 읽어봐.”
해솔의 익숙한 필체였다.
재하는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쪽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나, 아직 여기 있어.”
바람이 불어와 종이를 살짝 흔들었다.
해솔은 없었지만, 그녀의 흔적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었다.
다시 돌아온 골목길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재하는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해솔과 함께 뛰어다니던 길이었다.
벽에는 여전히 낡은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고,
담벼락 너머로 저녁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재하야, 빨리 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돌아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웃으며 속삭였다.
“해솔아, 나 여기 있어.”
노을빛이 골목길을 감싸 안았다. 해솔은 떠났지만,
그녀의 흔적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재하는, 여전히 그 흔적을 따라가며 살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