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어두운 밤, 궁궐 깊숙한 곳,
인적 하나 없는 후미진 정자에 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한 명은 이 나라의 젊은 황제, 태준이었다.
냉철한 눈빛과 굳게 다문 입술에서 그의 강인한 의지가 드러났다.
다른 한 명은 검은 복장을 한 여인, 아린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날카롭고 단호했으며, 어떤 임무라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조태후의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태준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반드시… 그녀의 검은 속내를 밝혀내야 합니다.”
아린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이번 일은… 그 어떤 때보다 위험할 것입니다.”
태준은 아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그대는 이번 황후 간택에 참여해야 합니다.”
아린은 잠시 망설였다.
첩자의 신분으로 황후 간택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태준의 뜻이 확고함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가 된다면… 조태후를 가장 가까이에서 감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준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내 측근들에게조차…
우리의 관계를 들켜서는 안 됩니다. 특히… 조태후의 눈을 속여야 합니다.”
아린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태준과의 비밀스러운 약속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이제 그녀는 두 개의 가면을 써야 했다.
첩자로서의 냉철한 가면, 그리고 황후 후보로서의 화려하고 우아한 가면.
며칠 후, 궁궐은 차기 황후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분주했다.
화려한 장식들이 궁궐 곳곳을 수놓았고,
전국에서 모여든 규수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마치 꽃밭을 연상케 했다.
아린 또한 그들 중 한 명으로서, 화려한 궁중 복장을 하고 다른 후보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다른 후보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화려한 옷차림과 과장된 미소, 가식적인 대화들 속에서 아린은 철저히 이방인처럼 행동했다.
어느 날 밤, 궁중에서 성대한 가장무도회가 열렸다.
화려한 음악과 춤, 그리고 웃음소리가 밤늦도록 이어졌다.
태준은 가면을 쓴 채 무도회에 참석하여 여러 후보들과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아린을 발견했지만,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쳐야 했다.
조태후의 눈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태준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추었다.
화려한 가면 뒤에 숨겨진 그녀의 눈빛은 어딘가 슬픔과 고독을 담고 있는 듯했다.
평소 검은 복장으로 냉철하고 날카로운 모습만 보였던 아린은
화려한 비단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그 모습은 태준에게 낯설면서도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태준은 눈을 뗄 수 없었다.
평소의 강인한 모습 뒤에 감춰진 여린 감정이 가면 너머의 눈빛을 통해 드러나는 듯했다.
태준은 그녀의 변화에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늘 임무를 수행하는 냉정한 첩자로서만 보았던
그녀에게서 처음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 이끌렸다.
가면 뒤에 숨겨진 그녀의 진심을 알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태준은 여인에게 다가가 가면을 쓴 채 말을 걸었다.
“오늘 밤… 유독… 눈에 띄시는군요.”
여인은 깜짝 놀라 태준을 바라보았다.
가면 때문에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위엄을 느꼈다.
아린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과찬이십니다.”
아린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른 후보들처럼 화려한 언변이나 교태를 부리는 대신, 그녀는 솔직하고 담백하게 대답했다.
태준은 여인의 대답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
그는 다른 후보들과는 다른 그녀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끌림을 느꼈다.
태준은 여인에게 은밀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내일 밤… 연못가에서… 달빛 아래… 기다리겠습니다.”
여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준은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일 밤… 진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겠군.’
무도회가 끝난 후, 아린은 태준과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어두운 밤, 연못가에 홀로 서 있는 태준의 모습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폐하…” 아린은 조심스럽게 태준을 불렀다.
태준은 아린을 돌아보았다.
가면을 벗은 그의 얼굴은 차갑고 냉정했지만,
아린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미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조태후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태준은 주변을 살피며 낮게 속삭였다.
아린은 조태후가 꾸미고 있는 음모에 대해 보고했다.
태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아린의 말을 경청했다.
두 사람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정체를 숨긴 채, 위험한 거래를 이어가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과 함께 묘한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