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첫 빛이 궁전의 첨탑을 부드럽게 감쌌다.
차가운 바람이 창틀을 스치며 조용한 황궁을 깨웠다.
황후와 황태자가 아무리 그녀를 견제해도,
황제가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다면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황궁에서의 입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알렉스는 아이린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녀가 황궁에서 어떻게 소외당하는지,
얼마나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무력화되고 있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이린이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황제 앞에서 학문적 토론이 벌어졌다.
황태자가 외교 관계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고,
아이린은 그의 논리에 허점을 지적했다.
황태자는 당황했지만, 황후는 곧바로 웃으며 분위기를 바꾸었다.
"아이린, 네 의견도 흥미롭구나.
하지만 너무 책에만 파묻혀 있으면 현실 감각이 부족해지기 마련이란다."
그 말에 황궁 신하들조차 아이린을 우습게 여겼다.
아이린은 황후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그녀를 돕지 않았다.
황태자는 비웃듯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결국 아이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다시금 서고에서 책을 펼치던 아이린의 앞에 알렉스가 나타났다.
그는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황녀께서는 이번 생에서 어떤 길을 걸으실 겁니까?"
아이린은 순간 움찔했지만, 곧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무슨 뜻이지?"
알렉스는 천천히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깊고 단단했다.
"만약 제국을 뒤집을 계획이라면, 저도 함께하는 게 좋겠군요."
아이린은 그의 말에 당황했지만, 한편으로 가슴이 뛰었다.
지금껏 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황궁에서 외톨이였다. 누구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이 남자는 그녀에게 동맹을 제안하고 있었다.
아이린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놀랍도록 날카로웠다.
마치 그녀의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
"당신은 대체 누구지?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알렉스는 그녀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황녀님은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황제의 직속 조직과 연관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인 이유로 황녀님께 관심이 있습니다."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아이린은 순간 숨을 삼켰다.
그는 언제나 거리낌 없이 그녀를 감시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하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관심이라..."
아이린은 그를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나를 감시하는 역할이 아니라?"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감시는 맞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감시자가 가장 가까운 동맹이 될 수도 있죠."
그의 손이 스치듯 그녀의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손끝에 걸린 검은 장갑이, 그녀와 그를 나누는 마지막 장벽처럼 느껴졌다.
아이린은 알렉스의 손끝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이 동맹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렇기에 더 가치 있지 않습니까?"
아이린은 한동안 침묵했다.
알렉스의 붉은 눈동자는 마치 어둠 속에서도 불타는 듯 강렬했다.
황실에서 아무도 그녀를 믿지 않았고,
그녀조차도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남자는 그녀에게 선택지를 주고 있었다.
아이린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좋아. 서로의 비밀은 묻지 않는 걸로 하지. 대신, 내 방식대로 움직이겠어."
알렉스는 그녀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황녀님."
그날 이후, 아이린과 알렉스는 은밀한 동맹을 맺었다.
아이린은 자신이 견제받고 있다는 것을 이용하여 더욱 신중하게 움직였고,
알렉스는 그녀가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그녀는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알렉스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눈길 하나, 손짓 하나에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