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일정은 빠듯했다.
하루 종일 회의를 반복하며,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이준혁은 단 한 순간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지만 서희는 이제 그의 피로를 감지할 수 있었다.
미세하게 굳어지는 턱선, 때때로 한 손으로 이마를 짚는 습관,
그리고 서류를 넘길 때 손끝에 힘이 들어가는 모습까지.
그는 무리하고 있었다.
호텔에 도착한 후, 서희는 잠시 짐을 정리하며 긴장을 풀려 했다.
그러나 문득, 옆방에서 문이 살짝 열린 걸 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이준혁이 서 있었다.
그는 작은 약통을 손에 쥐고 있었다.
조용히 병원에서 받은 약을 꺼내 챙기는 모습이었다.
서희는 순간적으로 멈춰 섰다.
그제야 확신했다.
이 병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본부장님.”
서희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준혁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표정에서 짧은 당황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덤덤한 얼굴을 유지했다.
“원래부터 알고 계셨죠? 이 병.”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는 순간, 서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왜 아무한테도 말 안 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강해졌다.
“도와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준혁은 한숨을 내쉬며 약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혼자 감당할 수 있어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하지만 서희는 그 말 속에서 숨겨진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었고, 이제 괜찮아요.”
그의 말에 서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이 가슴 깊이 박혀왔다.
준혁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눈빛은 깊고 고요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일이 많았어요.”
서희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준혁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몸이 약했죠. 처음엔 부모님도 걱정했지만, 결국 내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이었어요.”
그는 짧게 웃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어디에서도 누구에게 의지할 수는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익숙해진 거죠.”
서희는 그의 말이 태연한 척 들렸지만, 그 속에 깃든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혼자였고, 스스로 강해지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래서 이 병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서희는 그가 얼마나 오래 이 외로움을 짊어져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요.”
서희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한 걸음 다가가, 그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본부장님이 아무리 강해도, 가끔은 누군가에게 의지해도 된다고요.”
순간, 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늘 혼자였다. 아무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언제나 완벽한 상사였다. 하지만 그 완벽함이 사실은 외로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서희는 비행기에서 그의 손을 잡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준혁은 분명 자신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를 걱정하는 감정이 단순한 직업윤리 때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서희는 스스로의 마음을 인정했다.
그를 걱정하는 이유는 단순히 비서로서가 아니었다.
그가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준혁은 여전히 자신이 혼자 감당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곁을 지키겠다고 말하는 것이,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실을 끝까지 그에게 알려줄 것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본부장님, 이제 혼자 있지 않아도 돼요."
준혁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한 사람이네요, 정 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