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건우와의 계약 연애가 시작된 지 두 달째.
다영은 여전히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건 계약일 뿐이야.'
하지만 그 말이 점점 자신에게 설득력이 없게 느껴지고 있었다.
건우는 변함없이 다정했고, 그녀를 챙겼으며, 늘 곁에 있어 주었다.
그리고 다영은 그가 없는 시간을 점점 어색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다영은 건우와 함께 그의 차 안에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건우는 뜬금없이 차를 한적한 강가 근처에 세웠다.
"왜 여기야?"
다영이 물었다.
건우는 잠시 말없이 강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5년 동안 널 잊으려고 했어. 근데 난 결국 못 잊었더라."
다영은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뭐?"
"처음엔 네가 날 원망할까 봐,
아니면 네가 날 기억조차 하지 않을까 봐 일부러 잊으려고 했어.
미국에서 공부도 하고 바쁘게 지내고, 일도 배우고,
정말 정신없이 살았거든. 근데 말이야…"
건우는 조용히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어딘가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사람이 바쁘다고 해서 마음까지 바뀌진 않더라.
네가 없는 시간 동안 내가 얼마나 비어 있었는지 깨달았어."
다영은 말문이 막혔다.
그동안 건우가 어떻게 살았을지,
그녀는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 왜 그때 그렇게 떠난 거야?"
다영의 목소리는 떨렸다.
5년 전, 건우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녀에게 남긴 건 단 하나의 말뿐이었다.
'미안해. 나 미국 가. 그렇게 됐어.'
그것이 이별의 전부였다.
그때 다영은 묻고 싶었다.
이유가 뭐냐고. 갑자기 왜 그러냐고.
하지만 건우는 단호했고, 다영은 그의 결정을 존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건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땐 내가 너무 어렸어.
우리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고,
내 선택권이 없다는 것도 몰랐어.
아버지가 내 앞길을 다 정해두고 있었는데,
난 그냥 따라야 하는 줄만 알았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오랜 시간 묵혀온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가 내 대학 진학도, 유학도 다 결정하셨거든.
내가 거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땐 겁이 났어.
네가 날 붙잡아 주길 바랐던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넌 아무 말도 안 했지."
다영은 당황하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넌 그걸 원했던 거야? 내가 널 붙잡기를?"
"아니,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었어.
네가 날 붙잡았다고 해도,
나는 결국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건우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다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널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너를 더 선명하게 떠올렸어. 처음엔 단순한 첫사랑이라고 생각했어.
3개월 동안 너를 좋아했던 게 내 전부라고 여겼고,
미국에 가면 그 기억도 희미해질 거라고 믿었어."
건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더라.
어느 날 문득,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네가 떠올랐어.
처음엔 그냥 추억이겠지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너에 대한 감정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더 깊어진다는 걸 깨달았어."
건우는 조용히 다영을 바라보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관심이 가는 여자가 너였어.
그래서 단순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5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게 사랑이었다는 걸 알았어."
건우의 진심을 들은 다영은 혼란스러웠다.
그가 5년 동안 그녀를 잊으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말이,
생각보다 훨씬 깊게 가슴에 박혔다.
'그럼 나는?'
그녀는 자신이 건우를 잊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
그의 존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다가왔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나는 건우를 좋아하고 있었어.'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아려왔다.
그런데 동시에 불안감도 엄습했다.
"우리… 계약 연애잖아."
다영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감정, 가짜 아니야?"
건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진짜야.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아."
다영은 그 말에 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건우의 진지한 시선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여전히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