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는 10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어릴 적 친구들과 뛰놀던 동네는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더 작아진 느낌이었다. 한 손엔 여행가방, 다른 손엔 작은 박스 하나를 들고 골목을 걸어가던 진우는 멈춰 섰다.
"여전히 여름은 뜨겁네."
그때였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진우? 너 맞아?" 돌아보니, 박혜주였다. 긴 생머리가 바람에 살짝 흩날리며 그녀의 얼굴을 감췄다 드러냈다. 진우는 잠시 말을 잃었다.
"혜주야? 와... 오랜만이다!"
"진짜 너 맞네! 언제 왔어?"
"방금."
그녀는 활짝 웃었다.
"정말 반갑다. 오랜만에 온 거면 우리 동네 한 바퀴 돌면서 얘기 좀 할래?"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예전처럼 동네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진우가 기억 속의 풍경을 하나씩 되짚을 때마다 혜주는 거기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골목길 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문방구는 아직도 운영 중이었고, 그곳 주인이었던 할아버지는 이제 손자에게 가게를 넘긴 상태였다.
"여기 기억나?"
혜주가 손가락으로 문방구 간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연하지. 여기서 너랑 같이 슬러시 사 먹던 거 아직도 생생해."
혜주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때 네가 슬러시 쏟아서 내 옷 다 젖었던 거 잊었어?"
"아... 그랬지. 너 엄청 화냈잖아."
진우가 머쓱하게 웃었다.
둘은 문방구에 들어가 초콜릿 바와 슬러시를 사 들고 동네 놀이터로 향했다. 진우는 낡고 삐걱대는 그네에 앉았다.
"여기선 시간이 멈춘 것 같아."
혜주는 그네를 천천히 밀며 말했다.
"우리도 여기서 멈출 수 있으면 좋겠다."
"서울은 어땠어?"
혜주가 물었다.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어. 친구도 없고... 네가 그리웠다."
진우의 솔직한 대답에 혜주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 그때 나한테 편지도 썼잖아. 아직도 갖고 있어."
"진짜?"
진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혜주는 가방에서 낡은 봉투를 꺼냈다.
"봐, 네 글씨 그대로야."
진우는 봉투를 받아들고 조심스럽게 열어 그 속의 편지를 읽었다. 그 안엔 어린 날의 서툴지만 진심 어린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네가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어. 우리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 혜주야, 넌 내 제일 좋은 친구야."
우는 편지를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이 혜주는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넌 정말 진지했어. 근데 난 그게 더 좋았어."
진우는 눈을 들어 혜주를 바라보았다.
"혜주야, 정말 고마워. 그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네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알겠어."
둘은 오래된 편지를 사이에 두고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 순간, 어릴 적 추억과 지금의 시간이 하나로 겹쳐져 서로의 마음을 더 깊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