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빛이 궁전을 희미하게 비췄다. 레온은 조용히 서 있었다. 어젯밤의 싸움이 남긴 여운이 여전히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황제와의 대립, 그리고 카일란과의 유대. 그는 이제 단순한 가이드가 아니었다.
카일란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동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탓인지, 레온이 옆에 있음을 확인한 후에야 겨우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상처가 남아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평온해 보였다.
레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왕국의 정원이 보였다. 그곳에서 무언가 잘못된 기운이 느껴졌다. 평소와 달랐다. 모든 것이 너무 조용했다.
그때, 문이 조용히 열렸다.
“레온 페르시아.”
낮고 나직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레온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문 앞에 선 이는 왕국의 정치 고문, 마르코 대공이었다.
“폐하께서 너를 찾으신다.”
레온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 부름이 단순한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섰다. 카일란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움직였다. 그러나 문을 나서는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레온.”
카일란이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 듯 흐릿한 눈으로 레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곧 돌아올게.”
그렇게 말하고 그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황제의 집무실은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았다. 레온이 들어서자, 황제 루시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왔군.”
레온은 침착하게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황제는 그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왔다.
“너와 카일란의 유대가 예상보다 깊은 것 같다.”
레온은 말없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릴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황제는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조용히 말했다.
“너는 네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레온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왕국입니다.”
“그래.”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렇다면, 너에게 주어진 임무를 잊지 마라. 카일란이 왕국에 위협이 된다면, 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레온은 한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황제의 말은 너무나 명확했다. 카일란이 왕국의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면, 그를 제거하라는 뜻이었다.
“……네.”
황제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가라.”
레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카일란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뭐라고 했지?”
레온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그냥 경고였다.”
카일란은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서로의 감정을 읽고 있었다.
그 순간, 궁전 밖에서 커다란 종이 울렸다. 긴급한 신호였다.
카일란과 레온은 동시에 창가로 달려갔다. 멀리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왕국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카일란이 낮게 중얼거렸다.
레온은 무언가 깨달은 듯 얼굴이 굳어졌다. 황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더 이상 조용한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왕국의 운명을 바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