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궁전의 회랑은 차가운 달빛 아래 숨을 죽이고 있었다. 깊어지는 정적 속에서 금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조용히 발을 옮겼다. 레온 페르시아. 황제의 가이드이자, 이제는 기사 카일란과 감각적으로 연결된 존재.
그는 여전히 자신의 손끝에 남아 있는 여운을 의식하고 있었다. 감각적 유대가 끝난 후에도, 그 감촉이 사라지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피부 위에 남은 흔적처럼 생생했다.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걸까.’
레온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이미 금단의 선을 넘어버린 이상,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황제에게 발각된다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 카일란 역시 위험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카일란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문득, 그가 멈춰 섰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레온.”
익숙한 목소리였다. 조용하지만 결연한 힘이 실린 목소리. 레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일란을 바라보았다.
갑옷을 벗고 검은 셔츠 차림으로 서 있는 카일란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단단한 결심이 있었다.
“돌아가려는 거냐.” 카일란이 낮게 물었다.
레온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 관계는 위험해.”
“…알고 있다.”
“네 감각이 나에게 점점 의존하게 된다면, 결국 너는 나 없이는 버틸 수 없게 될 거야.”
카일란은 그 말을 듣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기척이 가까워질수록, 레온의 심장은 미세하게 흔들렸다.
“너는 나를 피하려 하지만, 난 널 찾고 있어.” 카일란이 낮게 읊조렸다. “처음으로, 내 감각이 잠잠해진 순간이었어. 너 없이는 다시 그 혼란 속으로 떨어질지도 몰라.”
레온은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가이드링크를 통해 서로를 깊이 느낄수록, 서로에게 더욱 빠져든다는 걸.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레온이 물었다.
카일란은 짧은 한숨을 쉬고, 단호하게 말했다.
“도망칠 생각하지 마.”
레온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카일란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레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를 혼자 두지 마.”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야를 가르는 듯한 무거운 기척이 느껴졌다.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그리고 곧이어 들려온 냉정한 목소리.
“카일란 아스브론.”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왕국의 최고 권력자, 황제 루시우스가 있었다.
황제는 차가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내 명령을 어기는 건가?”
그 말 한마디에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레온은 그제야 깨달았다.
황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레온 페르시아, 너는 나의 가이드로서 나만을 보좌해야 한다.” 황제는 서늘하게 말했다. “그런데 감히, 네가 한낱 기사와 유대를 맺었다고?”
레온의 손끝이 떨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황한 것은 카일란이었다.
“…폐하.”
“그를 처단하라.”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병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카일란은 본능적으로 검을 쥐었지만, 곧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충성인가, 감각적 유대인가.
그의 손끝이 떨렸다. 그는 황제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레온을 죽이라는 명령을 따를 수는 없었다.
레온 역시 차가운 시선을 유지하며 황제를 응시했다.
“…카일란.”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지만, 동시에 단호했다. 카일란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결정을 내렸다.
칼날이 번뜩였다. 그러나 그것은 황제가 아닌, 병사들을 향해 휘둘러졌다.
“나는….”
카일란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레온을 지키겠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전장의 불길이 다시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