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혁은 밤이 깊어질수록 사라의 기억에 사로잡혔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녀가 그를 향해 웃으며 내민 손과 마지막 순간의 사고 장면이 교차하며 떠올랐다. 그는 손에 든 사진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잊으려고 했던 건데... 왜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거야."
그의 시선은 서재의 창문 밖으로 향했다.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담장 너머의 어두운 풍경이 그에게 과거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기울였다.
한편, 나현은 방 안에서 서성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납치된 것은 분명한데, 그 과정이 이상할 정도로 매끄럽고, 그녀를 해칠 의도가 없어 보이는 재혁의 태도가 의문스러웠다.
"대체 이 남자는 뭐지?"
나현은 중얼거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저택의 다른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그녀에게 왠지 모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자신이 갇힌 방 안을 둘러보며 재혁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했다. 그가 단순히 조직의 일원이라기엔 너무 침착하고, 그녀를 대하는 태도 역시 단순한 명령 수행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
그녀는 속삭이며 그를 더 알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 대한 경계심도 놓칠 수 없었다.
재혁은 결국 서재를 나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사라의 사진을 서랍 깊숙이 넣으며 다시는 꺼내지 않겠다는 듯 서랍을 세게 닫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흔들림이 서려 있었다. 그가 침대에 앉아 눈을 감았을 때, 사라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재혁아..."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나현의 방을 떠올렸다. 그녀는 분명 사라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가 왜 이렇게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아침 햇살이 저택의 창문을 통해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나현은 방 안에서 조용히 눈을 떴다. 어젯밤의 복잡한 생각들이 꿈처럼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그녀를 감싸고 있는 이 상황은 현실 그 자체였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방 안을 둘러보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경호원이 들어와 짧게 말했다.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따라오시죠."
나현은 잠시 망설였지만, 문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경호원의 뒤를 따라가며 복도를 걸었다. 저택의 내부는 여전히 고요했지만, 곳곳에서 느껴지는 세련됨과 단정함이 그녀를 압도했다.
식당에 도착하자, 재혁이 이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는 커피잔을 손에 들고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현이 들어오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앉아라."
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
나현은 긴장된 얼굴로 테이블 반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간단하지만 정갈하게 준비된 아침 식사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저를 이렇게까지 가둬두는 건가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데..."
재혁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지만, 그 안에는 어딘가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넌 내가 책임져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 그 이상은 알 필요 없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나현은 더 이상 질문을 던질 용기를 내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재혁을 몰래 관찰했다. 그의 표정, 손짓, 그리고 차가운 말투에도 어딘가 감추어진 고독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가 단순히 냉혹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식사가 끝나갈 즈음, 재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너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얌전히 있어라.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 쓰지 말고."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령이 담겨 있었다.
나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더 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그녀는 재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금 그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