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현은 일상으로 돌아간 후에도 한동안 어색함을 느꼈다.
졸업 전시를 준비하며 캠퍼스를 누비던 그녀는 저택에서의 기억을 잊으려 애썼지만,
문득문득 재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
조용히 독백하며 스케치를 완성하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캔버스 위에 그려진 그림 속 인물은 자신도 모르게 재혁을 닮아 있었다.
"이제 그만 잊어야지..."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리움과 미련이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 재혁은 저택의 서재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현을 떠나보낸 후, 저택은 더없이 조용해졌다.
그 고요함은 그에게 평화가 아니라 공허함으로 다가왔다.
그는 서랍 속에 감춰둔 사라의 사진을 꺼내 들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또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군..."
술잔을 채우며 그는 자신을 자책했다.
나현이 떠난 것이 올바른 결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그녀의 부재를 끊임없이 되새기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나현은 늦게까지 졸업 전시 준비를 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익숙한 거리를 지나던 그녀는 뒤따라오는 발소리를 느꼈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낯선 남자들이 나타났다.
"너지? 강재혁 여친이라는 년이"
한 남자가 비웃으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반짝이고 있었다.
"재혁이 그렇게 숨기던 애라더니. 생각보다 평범한데?"
나현은 몸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뒷걸음질 치며 도망칠 틈을 찾았지만,
이미 남자들은 그녀를 완벽히 둘러싸고 있었다.
"그냥 조용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그들은 나현을 강제로 차에 태우며 떠났다.
그녀는 절망 속에서 재혁의 이름을 떠올렸다.
저녁 늦게, 재혁은 부하로부터 급히 연락을 받았다.
"보스,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일인데?"
부하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대 조직에서 나현을 납치했습니다. 직접 당신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겠다고 합니다."
그 순간, 재혁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는 말없이 전화를 끊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재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강재혁."
낯익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상대 조직의 보스였다.
"내가 뭘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재혁은 차갑게 대답했다.
“헛수고 했군. 그녀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보스는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럼 그 때 죽였어야지. 왜 안하던 쇼까지 하면서 그녀를 살렸지? 흑요석 강재혁 답지않게"
재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조건을 말해."
보스는 짧게 침묵하다가 말했다.
"내일 정오까지 네 조직의 무기 창고 위치를 넘겨라. 그러지 않으면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그녀를 다시는 못 볼 거다."
전화가 끊기자 재혁은 잠시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마음은 불안과 분노로 뒤섞였지만, 그는 이성을 유지하며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현이 있는 위치를 알아내. 그게 최우선이다. 그리고 내일 정오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라."
부하들이 흩어지자, 재혁은 다시 혼자 서재에 남았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겠다."
나현은 어둠 속에서 차갑고 불안한 공간에 갇혀 있었다. 그녀의 손목은 묶여 있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았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제발….도와주세요…"
희미한 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가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