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안은 흔들리고 있었다.
에르반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에게서 이상한 안정감을 느꼈다.
마치 오래전부터 곁에 있어야 했던 사람처럼,
그의 존재만으로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동료애인지, 아니면 더 깊은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리안은 알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애써 감정을 부정했다.
‘이건 단순한 동행일 뿐이다.’
그러나 불쑥 찾아오는 감정들은 그의 의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에르반이 다정한 말 한마디를 건넬 때마다,
자신을 깊은 시선으로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조용히 두드려졌다.
한편, 에르반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그는 리안을 알고 있다고만 했고, 과거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지만,
정작 진실은 말하지 않았다.
리안은 그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쉽게 묻지 못했다.
‘나는 그를 얼마나 믿어야 하는 걸까?’
이런 혼란 속에서, 리안은 점점 에르반과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침이 밝아오고,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나섰다.
어느새 숲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짙어진 녹음과 안개가 자욱한 길을 따라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그러나 전날과는 달리 리안은 에르반에게 말을 거는 일이 적어졌다.
그가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다는 걸 에르반도 눈치챈 듯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걷다가, 에르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용하시군요.”
리안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단순히 생각이 많을 뿐입니다.”
에르반은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제 탓이라면, 말씀해 주십시오.”
리안은 그의 말에 당황했다.
그는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 말을 돌릴 수도 없었다.
“…당신이 저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 신경 쓰입니다.”
리안은 솔직하게 말했다.
“저는 당신을 처음 만났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에르반은 한동안 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다면, 저를 완전히 믿지 못하시겠군요.”
리안은 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리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에르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에르반, 제게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에르반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그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리안은 답을 듣기 전까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저를 아는 것처럼 행동하시면서도,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도대체 왜 저를 돕고 계신 겁니까? 제 실이 끊어진 이유를 알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리안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살짝 날이 서 있었다.
불안과 의심이 쌓여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는 에르반이 침묵하는 것이 더욱 답답했다.
에르반은 한숨을 내쉬며 리안을 바라보았다.
“때가 되면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 말만 몇 번째인지 아십니까?”
리안은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말했다.
“전 지금 불안합니다. 제 실이 끊어졌고, 제 운명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하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밝히지 않으시죠.”
에르반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는 리안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제 말을 믿으실 수 없겠지만, 저는 당신을 지키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리안은 그 말을 듣고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답을 얻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더 이상 캐묻는다고 해도 에르반이 입을 열 것 같지는 않았다.
리안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