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더 흘렀다.
여주와 도현은 정해진 것처럼 계속 만남을 이어갔다.
여주는 처음의 극심한 경계심을 조금씩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도현은 겉으로는 차분하고 냉정해 보였지만,
그녀를 배려하는 모습은 진심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여주의 작은 표정 변화도 놓치지 않고,
그녀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이면 재빨리 화제를 바꾸거나 그녀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밤이 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잠이 들 때마다 여주는 어김없이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의 남자는 매번 더욱 선명하게 그녀 앞에 나타났다.
이제는 그의 얼굴 윤곽까지 어렴풋이 보일 정도였다.
그는 여전히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칼날은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어느 날, 도현은 여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잠을 잘 못 주무시나요?”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만날 때마다 얼굴이 조금씩 더 안 좋아 보이셔서… 걱정이 됩니다.”
여주는 그의 걱정 어린 시선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조금… 잠자리가 불편해서요.”
그녀는 차마 꿈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 꿈이 너무나도 현실 같아서, 마치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현은 여주의 대답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뭐든 하고 싶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주는 그의 따뜻한 말에 잠시 흔들렸다.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꿈속 남자의 슬픈 눈빛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도현에게 마음을 열고 싶었지만,
전생의 기억인지 알 수 없는 악몽은 그녀를 끊임없이 붙잡고 있었다.
그날 이후, 도현은 더욱 세심하게 여주를 챙겼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 들려주고, 그녀가 좋아하는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는 여주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여주는 그런 도현에게 점점 더 끌리기 시작했다.
그의 따뜻함과 배려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악몽은 더욱 선명해졌다.
이제는 꿈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미안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미안하다…”
여주는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도현의 따뜻함과 꿈속 남자의 슬픈 눈빛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녀는 도현에게 마음을 열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두 개의 감정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마치 두 개의 세계가 그녀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그녀는 혼란과 고통 속에서 점점 더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