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프로젝트 촬영이 끝난 늦은 저녁이었다.
스태프들은 하나둘 자리를 뜨고, 소민도 서둘러 짐을 챙기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날씨 예보에는 비 온다는 말 없었는데.”
소민이 난감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산을 챙기지 않아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준호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소민 씨, 집까지 바래다줄까요?”
그는 자신의 차 키를 흔들며 말했다.
소민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 빗속을 혼자 걸어가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럼… 신세 좀 질게요.”
차에 올라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민 씨는 연애할 때도 이렇게 신중한 편인가요?”
소민은 질문의 의도를 고민하며 대답했다.
“아마도요. 저는 감정보다는 이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요.
감정에 휩쓸리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감정을 너무 억누르면 진짜 중요한 걸 놓칠 수도 있잖아요.”
소민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준호 씨는 어떤 연애를 했어요?”
준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
“저는 감정에 충실한 편이었어요.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솔직하게 표현하고,
순간을 즐기려고 했죠. 하지만 그렇게 해서 오래 가진 연애는 없었어요.”
소민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준호는 농담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끔은 감정이 너무 앞서다 보니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래가지 못한 걸 수도 있죠.”
소민은 그 말에 묘한 공감을 느꼈다.
그녀는 반대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연애를 지켜주는 길이라고 믿었지만,
결국은 둘 다 연애에 실패한 셈이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며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갑자기 배고프지 않아요?”
준호가 차창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빗속을 달리던 차는 어느새 조용한 골목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소민도 생각해보니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촬영을 마쳤다는 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근처에 괜찮은 식당 있는데, 같이 갈래요?”
소민은 잠시 고민했지만, 집에 가봐야 혼자 라면을 끓여 먹을 게 뻔했다.
그래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두 사람이 들어선 곳은 분위기 좋은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벽난로가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공간에서 와인과 함께 스테이크가 서빙되었다.
식사를 하면서 두 사람은 더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거 연애 이야기뿐만 아니라, 일과 꿈에 대한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소민 씨는 연애 상담을 하지만, 정작 본인은 연애할 때 어떠세요?”
준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소민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연애를 완벽하게 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너무 조심스러우면, 좋은 기회도 놓칠 수 있어요.”
준호의 말에 소민은 순간적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종종 이런 식으로 그녀의 신념을 흔드는 말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레스토랑을 나설 때쯤, 빗줄기가 많이 약해져 있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으며 이야기했다.
“오늘 의외로 재밌었어요.”
소민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준호도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우연히 생긴 저녁 식사였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두 사람은 잠시 마주 보았다. 평소처럼 날카롭게 대립하던 순간들과는 달리,
이 순간은 부드럽고 편안했다.
그날 밤, 소민은 집에 돌아와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준호와 함께한 시간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자그마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전과는 다른 감정이 싹트고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