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로, 우진은 자신의 시야가 변하고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예전과 똑같은 일상을 보내는데,
이상하게도 강이준이 보일 때마다 세상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가 달릴 때, 옅은 회색의 하늘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가 웃을 때, 우진의 시야 속에서 무언가가 출렁였다.
‘이상해…’
그 감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우진의 세상에서, 강이준은 단순한 회색이 아니었다.
햇빛이 내리쬐는 운동장 위.
우진은 가볍게 몸을 풀며 천천히 트랙을 돌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훈련의 일부였다.
그는 언제나 혼자 뛰는 것이 익숙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갑자기 옆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선배, 같이 뛰어요!"
활기찬 목소리. 강이준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이미 그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육상부 신입생으로 들어오자마자 주목받은 재능 있는 선수.
하지만 우진이 그의 존재를 신경 쓸 일은 없었다.
적어도, 그가 바로 옆에서 웃으며 자신과 나란히 달리기 전까지는.
이준은 가볍게 뛰면서도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땀방울이 반짝이며 그의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수영부도 이렇게 뛰어요? 물속에서만 훈련하는 줄 알았는데."
우진은 별 감흥 없이 대답했다.
"체력 훈련."
이준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그렇구나! 근데 선배 엄청 빠른데요? 역시 운동하는 사람은 다르네."
우진은 별 대답 없이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계속 울리는 것 같았다.
훈련이 끝나고, 우진은 트랙 옆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이준이 옆에 털썩 앉더니 자신의 물병을 건넸다.
"이거 마실래요? 내 건 좀 차가운데."
우진은 손을 저었다.
"괜찮아."
그러자 이준이 물병을 입에 대며 활짝 웃었다.
"선배, 되게 무뚝뚝하네요. 원래 말 잘 안 해요?"
우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준은 너무 가까웠고, 너무 밝았다.
이준은 갑자기 트랙 너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달릴 때, 모든 게 선명해져요. 바람도, 햇빛도,
그리고 내 심장도. 선배는 어때요?"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물속에서 그는 생각이 정리되고, 세상과 분리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바람을 맞으며 달릴 때... 그는 알 수 없는 감각을 느꼈다.
"푸른색이 보여?"
이준의 말에 우진은 멈칫했다.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그는 여전히 색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지만,
이준과 함께 있을 때만큼은 무언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준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도 같이 훈련할래요?"
우진은 주저하다가 천천히 손을 잡았다.
그 순간, 그의 세상에서 처음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이 지나도,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우진은 훈련을 마친 후에도 자꾸만 운동장 쪽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준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준이 먼저 우진을 찾아왔다.
"선배, 오늘도 같이 뛸래요?"
우진은 대답 대신 조용히 몸을 풀었다.
이준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옆에서 함께 준비 운동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뛰기 시작했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우진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오늘따라 공기가 더 시원한 것처럼 느껴졌다.
"선배, 여름이 오면 더 뛰기 좋아질 거예요."
이준이 옆에서 말했다.
우진은 그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여름이 오면, 그는 또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그날 저녁, 우진은 물속에 몸을 담그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출렁이는 물결이 반짝였다.
이상했다. 물속에서도, 여전히 트랙 위의 바람이 느껴지는 듯했다.
다음날,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이준이 먼저 우진을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선배! 오늘은 기록 한 번 깨볼까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자리로 나섰다.
뭔가 모르게, 그와 함께 뛰는 시간이 기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