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의 부상은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붕대를 감았던 발목은 이제 부드럽게 움직였고,
다시 트랙을 밟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우진은 여전히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앉아있는 이준을 보며, 우진은 조용히 물병을 건넸다.
"마셔. 땀 많이 났잖아."
이준은 물병을 받아들며 웃었다.
"선배가 이렇게 챙겨주는 거, 아직도 낯설어."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그의 곁에 앉았다.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노을빛이 운동장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준이 슬쩍 우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난 선배같이 멋진 사람이랑 같이 운동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
종목은 다르지만, 이제 더 기대도 돼요?"
우진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했다.
기대도 돼? 어떤 의미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준을 바라보았다.
이준은 여느 때처럼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듯하면서도 진심이 담긴 표정.
우진은 그 말이 자신이 기대했던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준에게 자신은 단순히 동경할 만한 선배일지도 모른다.
우진이 느끼는 이 감정과는 다르게,
이준은 그저 같은 운동부에서 성장하는 동료로서 자신을 좋아하는 것뿐일지도.
그 생각이 들자 가슴 한쪽이 묘하게 무거워졌다.
우진은 애써 표정을 감추며 대답했다.
"...그래."
이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활짝 웃었다.
"잘 부탁해요, 선배."
그 순간 우진은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숙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자신이 바라는 의미가 아니라면?
이준이 정말 단순한 존경심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거라면?
우진은 손끝을 가만히 주물렀다.
대답을 듣고 싶으면서도, 듣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다.
운동장 한쪽에서 육상부 후배들이 웃으며 장난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바람이 불면서 운동장 가장자리의 나뭇잎이 살랑였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 순간을 음미했다.
이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선배, 오늘 하늘 색 진짜 예뻐요."
우진은 이준이 바라보는 곳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노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밀려왔다.
이준과 함께 있는 이 순간, 세상이 평소보다도 뚜렷하게 다가왔다.
무언가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마치, 이준과 함께할 때만 느껴지는 특별한 울림처럼.
가슴이 뛴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우진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준에게 기대도 된다는 말이 정말 단순한 의미라면?
자신의 마음만 너무 앞서 있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우진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곧 다시 이준을 바라봤다.
바람에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 편안하게 앉아 있는 그의 옆모습.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장면인데, 유독 오늘따라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준이 장난스럽게 팔꿈치로 우진의 팔을 건드렸다.
"근데 선배, 오늘따라 좀 이상해요."
"뭐가?"
"그냥... 뭔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데, 나한테 할 말 있어요?"
우진은 입을 열려다 닫았다. 말해야 할까?
아니면, 이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야 할까?
하지만 그때, 저 멀리서 육상부 후배가 이준을 부르며 다가왔다.
"이준아! 트레이너 선생님이 한 번 더 체크하고 가래."
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알았어."
우진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이준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나 갔다 올게, 선배."
우진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운동장에서, 아직도 가라앉지 않는 감정을 안고 하늘을 바라봤다.
우진은 여전히 푸른빛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을 잃고 싶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날 저녁, 우진은 기숙사 창가에 기대어 앉아 노트를 펼쳤다.
무언가를 적으려 했지만, 연필 끝은 한참 동안 공책 위를 맴돌 뿐이었다.
머릿속은 온통 이준의 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더 기대도 돼요?’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단순한 의미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우진은 한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우진은 자신을 감싸는 푸른빛을 다시 한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