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연은 사무실 한쪽에 서서 조용히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5년 동안 다닌 이곳과 작별할 날이 코앞에 다가왔다.
처음 입사했을 때의 설렘도, 중간중간 성과를 올렸을 때의 뿌듯함도 이젠 모두 희미해져 있었다.
그녀가 퇴사를 결심한 이유는 명확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야근, 쏟아지는 과중한 업무, 상사와의 잦은 충돌. 그리고 무엇보다 괴팍한 사장 강재현. 그는 항상 서연을 몰아세우며 차갑게 대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퇴사를 고민했지만, 늘 용기가 부족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내일만 버티면 끝이다.”
서연은 퇴사 메일을 작성하며 자신의 결정을 되새겼다. 메일 제목은 간단했다.
[사직서 제출: 한서연]. 클릭 한 번이면 모든 것이 끝나리라 생각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잠들기 전까지도 이 선택이 맞는지 스스로에게 수없이 묻고 또 물었다.
다음 날,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서연은 아침부터 평소처럼 일을 마무리하며,
동료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동료들은 서운한 기색을 드러내며 그녀를 붙잡았다.
“서연 씨, 진짜 퇴사하는 거야?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겠지?”
“응, 정말 고민 많이 했어. 다들 너무 고마웠어. 함께한 시간들 절대 잊지 않을게.”
누군가는 눈물을 보였고, 누군가는 선물이라며 작은 상자를 건넸다.
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과 작별했다. 하지만 그녀는 회사의 특정한 한 사람과의 대면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바로 강재현이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강재현이 그녀를 불렀다. 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그의 사무실로 걸어갔다. 두드리는 손이 떨렸다.
“들어오세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어딘가 미묘한 기색이 느껴졌다.
서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의 사무실은 여전히 정갈했다.
강재현은 책상 뒤에 앉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흔히 보던 냉정한 표정이 아닌, 다른 감정이 서려 있었다.
“앉아요.”
서연은 그의 지시에 따라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강재현은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서연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입을 열었다.
“한서연 씨.”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마치 단어를 신중히 골라내는 듯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퇴사한다고 해서 사실 좀 놀랐어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서연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미리 준비한 대답을 떠올렸다.
“개인적인 사정이에요. 더 좋은 기회를 찾고 싶어서요.”
“더 좋은 기회라...”
그는 말을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그 후,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서연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긴장했다. 그러던 중, 강재현이 의자를 뒤로 젖히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그는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나... 당신 좋아해요.”
서연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자신에게 차갑고 가혹하기만 했던 사람이 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그녀는 순간 얼어붙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마 당신은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의아할 거예요.”
강재현은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없으면, 이 회사는 유지될 수 없어요. 아니, 내가 유지될 수 없어요.”
그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표정에서는 진심이 묻어났다.
하지만 서연은 여전히 믿기 어려웠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단조로웠다.
“그게 무슨말이예요?”
그는 답 대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바보 같았죠.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당신이 떠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제야 알게 됐어요. 나는 당신이 있어야만 한다는 걸.”
서연은 그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복잡한 감정이 그녀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죄송해요. 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실망과 슬픔이 어리어 있었다. 서연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녀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나 당신 좋아해요.”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하필 지금? 대체 왜...”
서연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녀의 마지막 날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의 일도 그리 평탄하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