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렸다.
굵직한 빗방울이 도로를 두드리며 떨어졌고,
젖은 아스팔트는 은은하게 반짝였다.
거리는 한산했고, 가로등 불빛이 비에 반사되어 부드러운 광채를 뿜어냈다.
강이현은 옆에서 조용히 걸어가는 한서우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이미 그녀의 어깨에는 빗방울이 스며들어 어두운 얼룩이 남아 있었다.
“우산을 안 챙겼군요.”
이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우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게요. 급하게 나오느라 깜빡했어요.”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었지만,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이 살짝 추워 보였다.
이현은 조용히 한숨을 쉬며 손에 쥔 우산을 살짝 기울였다.
“들어오세요.”
서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좁은 우산 아래, 두 사람의 거리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빗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고, 그 속에서 두 사람은 천천히 걸었다.
이현은 의식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려 했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깨가 스치고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우산을 기울이자 서우의 향기가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라벤더와 비에 젖은 흙냄새가 묘하게 어우러졌다.
“이렇게 누군가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게 사랑의 시작이에요.”
서우가 조용히 말했다.
이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마치 당연한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게 사랑이라고요?”
“네.”
서우는 가만히 빗방울이 떨어지는 도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멀리서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시작돼요.
이렇게 함께 걷고,
같은 빗소리를 듣고,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부터요.”
이현은 그녀의 말이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늘 혼자였다.
연기할 때도,
촬영장에서도,
대본을 외울 때도.
감정이란 것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좁은 우산 아래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이상하게도 미묘하게 두근거리는 걸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실전 연애 연습일 뿐이다.’
그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어느새 서우의 옆모습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살짝 젖은 입술,
그리고 무심한 듯 걸으면서도 주변을 조용히 관찰하는 그녀의 태도.
“비 오는 날은 좋아합니까?”
이현이 물었다.
서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요.”
“왜요?”
“조용하니까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비가 오면 실내로 들어가잖아요. 그때만큼은 세상이 조금 한적해지는 것 같아요.”
이현은 그녀의 대답을 곱씹으며 우산을 조금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그의 어깨가 조금씩 젖기 시작했다.
“그런데 강이현 씨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세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앞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그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비 오는 밤, 그는 한서우와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그들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빗소리는 더욱 선명해졌고,
거리에는 간간이 가로등 불빛만이 남아 있었다.
서우가 걸음을 늦추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걷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이현은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걸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대부분 비가 오면 실내로 들어가곤 했죠.”
“그럼 오늘은 새로운 경험이겠군요.”
서우는 이현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러네요. 강이현 씨 덕분에.”
이현은 순간적으로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빗방울이 우산 끝에 맺혀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심장이 또 한 번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