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세계의 마왕 "아자젤"은 검붉은 왕좌에 앉아 한 손에는 흑단으로 조각된 술잔을 들고 있었다.
짙은 붉은 빛이 감도는 술은 그의 손끝에서 일렁이며 가볍게 흔들렸다.
전당의 공기는 무겁고도 차분했다.
그의 주위에는 검은 갑옷을 두른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무릎을 꿇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옥의 가장 깊은 곳, 어둠의 전당에 모인 자들은 오직 하나의 목소리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아자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루한 듯 술잔을 기울이며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너무 완벽하군. 지루하기 짝이 없어.”
그의 말에 전당에 있던 악마들은 침묵했다.
마왕이 권태를 느끼고 있다는 것은 곧 피바람이 불어닥칠 징조였기 때문이다.
몇몇 부하들은 조심스럽게 서로를 바라보며 누군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지만,
감히 마왕의 말을 가볍게 받을 자는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전당의 공기가 변했다.
하늘이 찢어지듯 거대한 빛줄기가 쏟아지며, 순백의 날개를 펼친 존재가 나타났다.
빛 속에서 발산되는 강력한 신성한 기운에 전당을 채우던 어둠이 일순간 밀려났다. 악마들이 본능적으로 이를 갈며 몸을 움츠렸다.
아자젤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언제나 그에게 불청객이었다.
“아자젤,”
천사의 목소리는 위엄으로 가득했다.
그가 그토록 질색하는 정의로운 음색이었다.
“너와 나의 싸움은 영원할 줄 알았지. 하지만 이번엔 내가 선수를 쳤다.”
“흥.”
아자젤은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팔걸이에 팔을 괴고 몸을 기대었다.
“또 무슨 헛소리냐, 미카엘.”
미카엘. 신의 가장 충직한 전사이자, 빛의 군대를 이끄는 자.
그리고 아자젤이 가장 성가시게 여기는 존재.
그는 늘 정의를 외치며 싸움을 걸어왔고, 아자젤은 그 도발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심심함을 달래곤 했다.
“지구라는 행성이 멸망 위기에 처했음을 알고 있을 거야.”
미카엘의 금빛 눈동자가 빛났다.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것이다.”
지구. 아자젤은 그 단어를 되뇌었다. 그의 관심에서 한참 벗어난 미미한 행성.
멸망이든 번영이든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이 그곳을 차지하겠다고?
그의 표정이 사뭇 달라졌다.
“흥미롭군.”
아자젤은 턱을 괴고 천천히 웃었다.
“지구가 멸망하는 것과 네가 그곳에서 뭘 하든 상관없지만…
네가 힘을 키울 계획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미카엘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를 막아보아라. 지구에서 말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카엘의 몸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다시 어둠이 깔렸지만,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전당에 있던 악마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마왕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마왕이 직접 이계를 떠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카엘이 그렇게까지 도발한 이상 마왕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것이었다.
아자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장막 뒤에 걸린 검을 집어 들었다.
검의 칼날이 어둠 속에서 번쩍이며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냈다. 전당의 악마들은 숨을 삼켰다.
그가 검을 손에 쥐었다는 것은 곧 행동을 개시한다는 의미였다.
“좋다. 나도 재미삼아 구경이나 해볼까.”
그의 붉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부하들은 무릎을 꿇고 그의 명을 기다렸다.
“지구로 간다.”
그 한마디에 어둠의 군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검은 날개가 펼쳐지고, 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균열이 생겨났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며 그 틈새 너머로 푸른 별이 보였다.
아자젤은 마지막으로 한 번 지옥의 전당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미소 지으며 균열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 순간, 지옥의 마왕은 지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