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었고, 꽃집 안은 고요했다.
그러나 수현의 마음속은 결코 고요하지 않았다.
손목에 새겨진 붉은 문양은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녀의 머릿속엔 루시안의 말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제 네가 선택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수현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익숙했지만, 동시에 낯설었다.
평범한 꽃집 주인이었던 자신이 악마들과 얽혀버린 지금,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선택이라니… 무슨 선택을 하라는 거지?’
그때, 거울 속에서 루시안의 모습이 나타났다.
“고민이 많군.”
수현은 놀라지 않았다. 이제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익숙해져 있었다.
“고민 안 할 수가 있나요? 제 영혼이 걸린 계약이라면서요.”
루시안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 계약은 단순한 속박이 아니다. 네가 진정한 힘을 깨우기 위한 시작일 뿐.”
수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자꾸 나에게 선택을 강요하죠? 도대체 무슨 선택을 하라는 건데요?”
루시안은 거울 속에서 손을 뻗어 장미꽃 한 송이를 만들어냈다.
검은 꽃잎에 붉은빛이 번지는 장미였다.
“생명과 파괴. 그것이 네 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 힘이다. 네가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네 운명도 결정된다.”
수현은 손목의 문양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생명력을 상징하듯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동시에 불길한 기운도 느껴졌다.
“내가 생명을 택하면 어떻게 되죠?”
“너는 모든 것을 지키는 자가 될 것이다. 너의 힘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거야.”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파괴를 택하면요?”
루시안의 눈동자가 깊고 어두운 빛을 띠었다.
“네 힘은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이다. 네 손끝에서 꽃이 시들고, 세상은 황폐해질 거야. 그리고…”
루시안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속삭였다.
“네 영혼은 나의 것이 될 것이다.”
수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내가 당신의 마음을 얻는다면… 그땐 어떻게 돼요?”
루시안의 미소가 희미하게 번졌다.
“그땐 네가 나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악마의 마음을 얻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지.”
수현은 그의 말이 무겁게 느껴졌다.
‘악마의 마음을 얻는다… 그게 가능할까?’
그때, 밖에서 갑작스럽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수현은 흠칫 놀라며 문 쪽을 바라봤다.
이 시간에 손님이 올 리 없었다.
“누구세요?”
하지만 대답 대신 또 한 번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쾅쾅쾅!
수현은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인물을 보고 경악했다.
“벨라토르…!”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악마, 벨라토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군.”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번엔 또 뭘 하려고 온 거죠?”
벨라토르는 가게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이번엔 싸우러 온 게 아니다. 단지 궁금해서 왔을 뿐.”
수현은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궁금하다고요?”
“그래.”
벨라토르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루시안의 신부가 된 네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궁금하군.”
그는 장미 한 송이를 집어 들고 천천히 돌려보았다.
“네가 생명을 택할지, 아니면 파괴를 택할지… 그 선택이 우리 모두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테니까.”
수현은 그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다.
“난 아직 선택하지 않았어요.”
벨라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 곧 네가 어느 쪽을 택할지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돌아섰다.
“네가 루시안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 나도 지켜보겠다.”
그리고 그는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떠난 후, 수현은 문을 닫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거울 속의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결국 또다시 선택의 문제로 돌아오는군요.”
루시안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선택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현은 여전히 불안했다.
‘과연 내가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