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눈앞에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몸이 굳었다.
검은 덩굴이 어머니의 발밑에서부터 뻗어나왔고,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엄마…?”
그러나 어머니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너를 지켜야 했는데… 난 너무 늦었어.”
그 말에 수현은 충격을 받아 한 걸음 물러섰다.
“무슨 말이에요? 엄마가 날 지킨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어머니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제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차가운 어둠과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널 지키기 위해 난 악마와 거래를 했단다.”
그 말에 수현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거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태어나기 전, 난 병약했고 너를 무사히 낳을 수 없었어. 하지만 한 존재가 내 앞에 나타나 말했다. ‘네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나와 계약을 맺어라.’”
수현은 떨리는 손을 입에 가져갔다.
“그게… 루시안이었어요?”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자는 루시안이 아니었어. 그는 벨라토르였지.”
벨라토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수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벨라토르가… 엄마와 계약을?”
어머니는 비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난 네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어. 그러나 그 대가로 내 영혼은 그의 것이 되었단다.”
수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래서…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거였군요.”
어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널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넌 또다시 악마들과 얽히고 말았구나.”
수현은 주먹을 꽉 쥐며 속삭였다.
“난 몰랐어요… 이런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어요.”
그때, 어머니의 몸에서 뻗어나온 검은 덩굴이 점점 그녀를 휘감았다.
“수현아, 이제 네가 선택해야 해. 그 힘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인지.”
수현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의 모습이 다시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그 길을 걷는다면, 절대 두려움에 지지 마라.”
그 순간, 어머니의 모습이 빛으로 변하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엄마!”
수현은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붉은 장미 한 송이만이 남았다.
수현은 장미를 손에 쥐고 천천히 일어섰다.
어둠 속에서 다시 루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진실을 받아들였군.”
수현은 돌아서서 루시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모든 게 사실이었어요? 엄마가 벨라토르와 계약을 맺은 게…”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계약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거다. 네가 나와 얽히게 된 것도, 결국 그 계약의 연장선상이지.”
수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벨라토르가… 모든 걸 계획한 거군요.”
루시안의 눈이 어두운 빛을 띠며 말했다.
“그는 나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널 이용해서 나를 무너뜨리려는 거지.”
수현은 손에 쥔 장미를 꼭 쥐며 결심했다.
“이제 이해했어요. 당신의 마음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벨라토르를 막아야 해요.”
루시안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 네가 선택할 시간이 왔다.”
수현은 깊은 숨을 내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싸울게요. 그리고 이 계약을 내 방식으로 바꿀 거예요.”
루시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좋아.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