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주는 팬사인회 전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회사에서 11시까지 야근을 하고도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도 심장이 두근거려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내일 드디어 H를 만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하지? 고작 몇 초 동안인데, 그 짧은 순간을 어떻게 기억에 남게 만들지?'
핸드폰 메모장을 켜고 여러 문장을 적어봤다.
"항상 응원해요."
"무대 너무 멋있었어요."
"덕분에 힘이 많이 돼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뻔한 말처럼 느껴졌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뒤척이다가, 결국 새벽 4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잠들었다.
아침이 밝자,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내고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몇 번이고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리하면서 최상의 모습으로 보이고 싶었다.
최애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니까.
팬사인회 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팬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모두가 자신만의 최애를 만날 생각에 들떠 있었고,
각자 준비한 선물을 들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는 그룹 'VORTEX'의 모든 멤버를 좋아했지만,
특히 H를 보게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 듯했다.
VORTEX 멤버들을 보기 위해 모인 팬들의 얼굴에는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다.
각 멤버가 팬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웃음 하나에도 팬들은 감격하며 행복해했다.
민주는 떨리는 손으로 번호표를 확인하며 천천히 줄을 따라 걸어갔다.
점점 가까워지는 무대. 그리고 그 위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H.
그 순간, 그녀는 현실감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화면 속에서만 보던 사람이 눈앞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팬 한 명 한 명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눈을 맞추고,
웃어 주고, 짧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그녀의 심장을 더욱 뛰게 만들었다.
드디어 그녀 차례가 되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H는 따뜻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는 긴장한 나머지 입이 바짝 말랐지만, 어떻게든 자연스러운 척하며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최대한 밝게 말했다.
H가 그녀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순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네? 저요?"
민주는 얼떨떨하게 반응했다.
H는 사인을 하며 피식 웃었다.
"농담이에요. 하지만 정말 낯이 익어서요. 팬카페에서 활동 많이 하시죠?"
그의 말에 민주는 놀랐다.
설마 H가 팬카페에서 그녀가 남긴 댓글을 본 걸까?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어… 네, 가끔요!"
H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앨범에 사인을 완성했다.
"저도 팬카페 많이 들어가 보거든요.
저도 힘들 때 팬 분들 보면서 힘을 많이 얻어요.
나를 이렇게 진심으로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힘들어도 힘을 내야지 하면서요."
"항상 응원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런 순간이 있어서 제가 더 힘을 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에 민주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단순한 덕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렇게 큰 의미를 가질 줄이야.
"저야말로… 항상 힘을 얻어요. H 덕분에 정말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H는 주위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보디가드들이 팬과의 신체 접촉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민주는 순간 당황했지만, H가 먼저 내민 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와 단단한 악력이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 순간, 그녀는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팬 활동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H를 응원하며 보낸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가 진심으로 팬들에게 힘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에너지가 전해졌다.
마치 무대 위에서 강렬한 퍼포먼스를 펼칠 때와 같은 힘이 느껴졌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으며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짧지만 깊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짐했다.
이 순간을 평생 잊지 않겠다고.
팬사인회가 끝나고도 민주는 한동안 현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리고 운명처럼, 며칠 뒤 공연장에서 다시 한 번 H와 마주치는 순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