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왔다.
민주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하늘이 그녀의 심정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아름답지만, 서글펐다. 그녀는 H를 떠올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제는 보내줘야 할 사람이었다.
H와 함께한 순간들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처음에는 그저 무대 위에서 빛나는 사람을 동경하는 팬이었고,
그러다 운명처럼 가까워졌고, 마침내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깊어진 감정은 이제 두 사람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날 밤, 민주와 H는 마지막으로 만나기로 했다.
여느 때처럼 한적한 곳,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작은 공원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어쩐지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H는 먼저 와서 민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민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전히 멋있었고, 여전히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젠 보내줘야 할 사람이기도 했다.
H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왔네요.”
민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익숙한 정적이 흘렀다.
예전에는 이런 침묵조차 편안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우리…”
H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말 이게 최선일까요?”
민주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아픔, 후회, 그리고 놓아주기 싫은 마음까지.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우리가 진짜 인연이라면,”
그녀는 슬픔을 감추고 부드럽게 말했다.
“언젠가는 또 연인 사이로 만나겠죠?”
H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민주가 말을 이었다.
“그동안 잘 있어요. 늘 그랬듯… 내가 뒤에서 당신을 응원할게요.”
그 말이 끝나자, H는 끝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민주도 눈물을 참으려 애썼지만, 이미 두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이별 후, 민주와 H는 각자의 자리에서 버텨내야 했다.
H는 더욱 일에 몰두했다.
무대 위에서는 더 완벽한 퍼포먼스를 보여줬고,
인터뷰에서는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어딘가 공허해졌다는 것을.
팬들도 그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예전처럼 장난을 치며 팬들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긴 했지만,
가끔씩 어딘가 멍하니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
콘서트에서 한 팬이 "요즘 많이 힘든가 봐요?"라고 묻자, H는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그는 웃으며 "괜찮아요. 여러분이 있어서 힘낼 수 있어요"라고 했지만,
팬들은 그 미소가 조금 슬퍼 보였다고 이야기했다.
민주 역시 일에 집중했다.
덕질이 인생의 중심이었던 그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자신의 목표를 찾기로 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H의 노래가 들릴 때마다 그녀는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곤 했다.
그녀는 더 이상 그의 공연장을 찾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일에 몰두했고, 새로운 취미를 찾아 바쁘게 지내려 했다.
하지만 친구들과 노래방에 갔을 때,
H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고, 그녀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시간이 지나도,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H는 가끔씩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민주와 주고받았던 메시지는 이미 삭제된 지 오래였지만,
여전히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무대에 오르기 전, 관객석을 바라볼 때면 습관처럼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는 그녀가 없었다.
민주 역시 SNS에서 H의 활동을 확인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좋아하는 마음과 멀어지려는 마음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향한 응원을 멈추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조금 더 먼 곳에서.
그러던 어느 날, H는 팬사인회에서 한 팬이 건넨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진짜 인연이라면, 언젠가 다시 만날 거예요. 그때까지 항상 응원할게요.”
그 글을 읽은 순간, H는 손을 살짝 떨며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었다.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민주와 H는 다시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