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황제에게 받은 약속과 보호를 떠올렸다.
마을에서는 그녀를 아무도 지켜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적어도 안전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루시안은 그녀를 향해 다가오며 낮게 속삭였다.
“네가 성녀라는 이유로 황궁에 있는 걸로 끝날 거라 생각해?
황제는 널 이용할 거야.”
엘레나는 그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딘가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내 선택을 했어.”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난 황궁에 남겠어.”
루시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난 널 강제로라도 데려갈 거야.”
그 순간,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밀어냈다.
“이렇게 날 다루지 마!”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루시안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숨을 고르며 그를 노려보았다.
“너는…”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내 의지를 무시하고 있어.”
루시안은 잠시 침묵하더니, 마침내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네가 나를 거부한다 해도, 난 널 절대 포기하지 않아.”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흔들리지 않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엘레나는 그의 눈빛에서 깊은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그 순간,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경비병들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루시안은 그녀를 마지막으로 바라보더니,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새벽녘, 엘레나는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궁정에 들어선 그녀는 높은 천장과 위압적인 장식들 속에서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황제는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늑대인간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엘레나는 긴장된 얼굴로 대답했다.
“그들이 야생에서 살아가는 종족이라는 것 정도만 압니다.”
황제는 피식 웃었다.
“야생이라…. 그들은 단순한 유랑족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자들이다.”
엘레나는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반기를 들었다고요?”
황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수백 년 전, 그들은 우리와 평화를 맺었지만, 언제든 우리를 배신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네가 본 붉은 눈을 한 남자, 루시안.
그는 단순한 늑대가 아니다. 그 종족의 왕이지.”
그 말에 엘레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루시안이 왕이라니.
그녀는 그저 강한 늑대인 줄 알았는데,
그의 존재는 제국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들은 제국을 노리고 있다.”
황제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넌, 성녀로서 우리 제국을 지켜야 한다.”
엘레나는 혼란스러웠다.
루시안은 그녀를 위험에 빠뜨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그녀를 지키려 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황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정말로 제국을 배신하려는 걸까?
그러나 황제의 다음 말이 그녀의 생각을 끊었다.
“우리는 널 이용할 것이다.”
엘레나는 깜짝 놀라 황제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늑대 부족은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루시안은. 네가 성녀라는 이유로 너를 찾으러 올 테지.”
황제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때 우리가 그들을 처단할 것이다.”
엘레나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황제는 그녀를 미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녀를 이용해 루시안과 그의 부족을 몰살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엘레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엔 루시안이 떠올랐다.
그녀를 찾아와 ‘위험하다’고 했던 그의 말이.
황제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건 제국을 위한 일이니, 넌 걱정할 필요 없다.”
그러나 엘레나는 더 이상 황제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점점 더 루시안과의 인연을 무시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 그녀를 바라보던 애절한 시선,
그리고 ‘반드시 널 되찾겠다’는 그의 맹세.
이제 그녀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제국의 성녀로 남아 황제의 뜻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루시안이 말했던 진실을 찾아갈 것인가.
그녀는 깊은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녀는 더 이상 단순한 희생양이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