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은 사무실 창가에 서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이전 생에서는 이 순간에도 투자 유치를 고민하며 밤을 새우고 있었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는 다시 사업을 확장하는 대신, 서진과 함께할 시간을 늘리기로 결심했다.
이제야 깨달았다.
성공이란 혼자서 이루는 것이 아니며,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서진을 되찾고 싶었다. 그녀가 다시 자신을 믿고 사랑할 수 있도록.
다음 날, 도윤은 회사로 출근하자마자 재무팀과 경영진을 소집했다.
"해외 투자 확대 계획을 중단합니다. 당분간 무리한 확장은 하지 않겠습니다."
회의실 안은 술렁였다.
"대표님, 이미 진행 중인 계약들이 있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바꾸시면..."
한 임원이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하지만 도윤은 단호했다.
"수익성을 떠나, 회사의 안정이 먼저입니다.
기존 사업을 정리하고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과거의 그는 언제나 더 큰 성장을 목표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 끝은 파국이었다.
이번엔 다르게 가야 했다.
그는 회의를 마치고 비서에게 말했다.
"오늘 오후 일정, 최소한으로 줄여 줘."
비서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서진은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한도윤]
서진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전화를 받았다.
“서진아, 점심 같이 할 수 있을까?”
서진은 한숨을 쉬었다.
“도윤 씨, 왜 이러는 거예요?”
“그냥…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서.”
그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예전과 달랐다.
하지만 서진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알겠어요. 근처에서 봐요.”
레스토랑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갑자기 사업 확장을 멈추고, 연락하고.”
도윤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중요하니까.”
서진은 피식 웃었다.
“이제 와서? 너무 늦었어요, 도윤 씨.”
그녀의 단호한 말에 도윤은 조용히 손을 말아 쥐었다.
“그래도… 늦더라도 해보고 싶어.”
그의 진심이 전해졌을까.
서진은 잠시 흔들리는 듯했지만, 곧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요. 이혼할 거예요.”
그 말에 도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번엔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알겠어.”
서진이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네가 원하는 거니까.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야.”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변했다는 걸 증명할 시간이 필요해.”
서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증명해 봐요.”
그녀는 차갑게 말했지만, 어딘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밤, 도윤은 서진이 다니는 회사 근처를 찾았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녀가 퇴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서진이 건물에서 나오는 순간, 도윤은 멀찍이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가방을 메고 걸어갔다.
지친 일상 속에서도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도윤은 그녀를 보며 가슴이 아려왔다.
‘이제야 보이는구나.’
과거의 그는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도, 지쳐가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가 눈앞에 나타나면 서진은 부담스러워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택시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도윤은 서진이 좋아했던 작은 서점을 찾아갔다.
그녀가 즐겨 읽던 에세이를 하나 골라 책갈피를 끼워 서진의 사무실로 보냈다.
책갈피에는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예전엔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아. 너에게 소홀했던 나를 후회하고 있어.]
서진은 택배를 받고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책을 조용히 펼쳤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서진은 도윤에게 연락했다.
“도윤 씨, 시간 돼요?”
그의 심장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