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도윤은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긴장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윤서진의 차분한 목소리.
"도윤 씨? 갑자기 웬일이에요?"
오랜만에 듣는 그리운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가슴을 조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순간들,
늘 사업을 우선하며 그녀를 후순위로 두었던 지난날들.
결국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이혼 서류를 내밀었고,
그는 그 서류에 무심하게 사인해버렸다.
그리고 이제, 그는 모든 걸 돌이킬 기회를 얻었다.
“서진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우리,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서진이 당황한 듯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과거의 그라면 이런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를 붙잡지도, 애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다르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음… 오늘은 일정이 있어서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거절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는 이 답을 예상했어야 했다.
지난 생에서 그녀에게 얼마나 소홀했는지 떠올려 보면,
오히려 이렇게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럼… 내일은 어때?”
서진이 다시 한 번 망설였다.
그녀는 원래 단호한 성격이었다. 마음이 없었다면 돌려 말하지 않았다.
이 정도의 망설임이 있다는 건,
아직 자신에게 완전히 마음을 닫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내일 저녁에 시간 괜찮아요.”
그 순간, 도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마워, 서진아. 그럼 내일 저녁에 보자.”
통화를 끊고도 한참을 휴대전화를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기회는 왔다. 하지만 그는 두려웠다. 정말 되돌릴 수 있을까?
지난 생의 잘못을,
후회를,
이 두 번째 기회에서 만회할 수 있을까?
다음 날 저녁, 도윤은 서진과의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
그녀가 좋아했던 조용한 분위기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그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 쪽 자리에서 서진이 앉아 있었다.
여전히 단정한 차림새, 우아한 분위기.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서보다 한층 더 성숙해 보였다.
“도윤 씨, 오랜만이에요.”
그녀는 예의 바르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그럴 만했다.
그동안 연락 한 통 없던 사람이 갑자기 만나자고 했으니.
도윤은 천천히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네. 잘 지냈어요”
서진은 짧게 대답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건조한 톤이었다.
그 말 한마디에 도윤은 묘하게 가슴이 아려왔다.
그녀가 과거에 얼마나 외로웠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메뉴판을 펼쳐놓고 물었다.
“뭐 먹을래? 네가 좋아하는 트러플 파스타는 아직 있을 거야.”
서진이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제 취향을 기억해요?”
그 말에 도윤은 말을 잃었다.
그녀의 표정은 태연했지만, 그 속에 담긴 서운함을 그는 읽을 수 있었다.
과거의 그라면 이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미안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서진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사과는 왜…?”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어. 서진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제대로 신경도 못 썼고. 아니, 신경 쓰지 않았어.”
그는 숨을 고르고 서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내 잘못을 인정하고 싶어.”
서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도윤 씨,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도윤은 순간 머뭇거렸다.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나 사실 과거로 돌아왔어. 이번엔 너를 지키고 싶어.’
이런 말을 하면 그녀는 자신을 미친 사람 취급할 것이다.
그는 대신 조용히 말했다.
“…이제야 후회가 돼서 그래.”
서진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후회라…?”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서진이가 곁에 있을 때 더 잘했어야 했는데. 그걸 이제야 깨달았어.”
진심이었다.
서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다시 메뉴판을 펼쳤다.
“…저 트러플 파스타, 주문할게요.”
그녀의 말에 도윤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그의 말에 완전히 마음을 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기회를 얻은 듯했다.
이제 그는 진심을 증명해야 했다.
두 번째 인생에서, 절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로 다짐하며.
식사가 끝난 후, 두 사람은 레스토랑을 나섰다.
거리에는 부드러운 가로등 불빛이 깔려 있었고, 저녁바람이 불었다.
서진이 가볍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이제 가볼게요.”
도윤은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과거의 그라면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녀의 마음을 천천히 되돌려야 한다.
“조심히 들어가.”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서진은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가 정말 변한 건지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섰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도윤은 주먹을 살며시 쥐었다.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그녀를 다시 사랑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