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선택의 끝

1화: 선택의 끝

서울 도심의 작은 원룸, 어둠이 깔린 새벽의 정적 속에서 도윤은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꿈꾸며 열심히 일했다. 번듯한 회사에 취직해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가던 중이었다. 하지만, 친구의 부탁으로 서게 된 보증이 그의 삶을 뒤흔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루아침에 큰 빚을 떠안게 된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다급하게 손을 내밀었지만 모두 하나둘씩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텔레비전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방 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화면을 본 도윤은 고개를 떨구었다. 빚을 독촉하는 전화였다. 피할 곳도 숨 쉴 곳도 없다는 절망감에 손을 꽉 쥐고 있던 그 순간, 머릿속에 예상치 못한 이름이 떠올랐다.

재벌가 후계자이자 비즈니스계의 거물로 알려진 지혁. 예전에 잠깐 업무상 스친 적이 있었지만, 그와 도윤은 너무나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날, 도윤은 지혁의 차가운 눈빛 속에서 어딘가 모르게 고독함을 느꼈다. 마치 자신과 비슷한 외로움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마지막이야… 더 이상 선택지는 없어.’

도윤은 떨리는 손으로 지혁의 명함 속 번호를 눌렀다.

[고급스러운 오피스 빌딩]

다음 날, 도윤은 약속 시간에 맞춰 지혁의 사무실을 찾았다. 대리석 바닥과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어우러진 화려한 오피스 빌딩, 그곳은 도윤에게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초라한 옷차림이 유독 눈에 띄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도윤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가에 서 있던 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깔끔한 슈트에 완벽하게 정돈된 외모,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는 지혁의 모습은 강렬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혁: “뜻밖이군. 내게 연락이 올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지혁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도윤에게 다가왔다.)

도윤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도윤: “죄송합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하지만, 제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부탁드릴 곳이 없어서요.”

(지혁은 차분하게 도윤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도윤에게 제안을 꺼냈다.)

지혁: “내가 네 빚을 대신 갚아주지. 대신… 그에 상응하는 ‘계약’을 맺어야겠어.”

(도윤은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도윤은 지혁의 말을 곱씹으며, 그가 말하는 ‘계약’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어 긴장한 채로 지혁을 바라봤다.)

도윤: “어떤… 계약인가요?”

지혁: (서류를 꺼내며)

“우리 집안이 원하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내가 ‘안정적인 연인 관계’를 연기할 사람이 필요해. 너는 나의 연인으로서, 내가 가는 모든 자리에 동행해줘야 해. 간단히 말해, 계약 연인이 되어달라는 거지.”

(도윤은 예상치 못한 제안에 잠시 말을 잃었다. 연기라지만, 연인 역할을 하다니. 그 의미와 위험성이 실로 막막하게 다가왔다.)

도윤: “연인… 이라니요? 그게… 정말로 필요한 건가요?”

지혁: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필요하니까 제안하는 거겠지. 넌 단지 계약을 통해 내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돼. 서로 감정이 오갈 일은 없을 거야. 철저히 계산된 관계니까.”

(지혁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고, 그에게서 망설임의 기색조차 찾을 수 없었다. 도윤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벼랑 끝에 몰릴 것이라는 현실을 떠올렸다.)

도윤: (한숨을 쉬며)

“…좋아요. 그 조건으로 계약할게요.”

(도윤은 결국 서류에 서명하며 그와 계약 관계에 들어갔다. 그 순간 지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차갑게 느껴졌던 그 미소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지혁: “좋아. 이제부터 너는 나와 모든 자리에 동행하게 될 거야. 이 관계는 철저히 ‘개인적인 일’로 다루어야 해.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 그대로 나와 개인적인 ‘연인 관계’인 거지.”

(지혁은 서류를 정리한 후 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손길이 차가우면서도 이상하게 온기가 느껴져, 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혁의 눈빛이 여전히 차갑고 계산적임을 알면서도, 그는 왠지 모를 불안감과 설렘 속에서 이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생각했다.)

[새로운 길의 시작]

계약이 성립된 후, 도윤은 지혁과 모든 공식적인 자리와 비공식적인 만남에 동행하게 되었다. 화려한 파티장, 고급 레스토랑, 비즈니스 미팅… 도윤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옆에서 그를 이끄는 지혁의 존재가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어느 날 밤, 둘은 파티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도 지혁은 완벽하게 정돈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도윤은 그에게 다가가 살짝 머뭇거리며 물었다.

도윤: “이렇게까지 신경 써줄 필요는 없는데… 정말 괜찮으세요?”

지혁: (짧게 웃으며)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야. 네가 할 일은 그냥 이 옆에 있어주는 거지.”

(도윤은 그런 지혁을 바라보며, 그의 차가운 태도 뒤에 숨겨진 복잡한 감정들을 읽어내고 싶었다. 그가 왜 이런 관계를 원하는지,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지혁: “불편한가?”

도윤: “아니요… 조금 낯설긴 하지만, 생각보다 괜찮네요.”

지혁: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곧 익숙해질 거야. 네가 원하는 게 이거라면, 내가 그걸 지켜줄 테니까.”

(도윤은 그 말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이 관계가 단순히 계약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날 밤, 둘은 화려한 조명 아래 나란히 걸었다. 한 발 한 발,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서는 거리 속에서 도윤은 자신이 시작해버린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지만, 지혁과 함께 걸어야 할 새로운 길이 펼쳐져 있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