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의 한적한 마을에 도착한 후, 성우와 유리아는 마을 근처의 작은 언덕을 걸었다.
바닷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왔고, 저 멀리 파도가 잔잔하게 밀려왔다. 유리아는 묵묵히 앞장섰고,
성우는 그녀의 걸음을 따라갔다.
“이곳에서 대체 뭘 보여주려는 거예요?”
성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유리아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녀는 마을 외곽의 오래된 절 근처로 성우를 데리고 갔다.
절은 크진 않았지만, 오랜 세월을 지나온 듯한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유리아는 절의 뒤편으로 성우를 안내했다.
커다란 고목나무 아래, 바다를 바라보는 작은 정자가 있었다.
“여기예요.”
유리아는 정자의 난간에 기대어 섰다. 성우는 그녀의 옆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닷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이곳에서 뭘 봐야 하죠?”
유리아는 천천히 성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성우의 이마를 가볍게 스쳤다.
순간, 성우의 머릿속이 하얘지며 눈앞이 흐려졌다.
전생의 기억
성우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현재의 남해가 아니었다.
오래된 초가집, 한복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걸어오는 한 남자.
그 남자는 성우였다. 하지만 분명 성우가 기억하는 자신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앞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유리아였다.
“…이게 뭐죠?”
성우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했던 단어가 아니었다.
“유령아,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자신이 한 말에 성우는 더욱 놀랐다. 그는 이 말을 의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기억 속의 자신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유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유리아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기다렸죠?”
기억 속의 성우는 유리아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 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한 듯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반복되어온 행위처럼.
“이곳이… 우리의 전생이에요?”
성우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네.”
유리아가 대답했다.
“우리는 아주 오랜 옛날, 이곳에서 처음 만났어요.”
과거의 조각들
기억 속 장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성우는 자신이 이곳에서 유리아와 함께했던 과거의 순간들을 하나씩 마주했다.
어느 시대에는 학자로, 또 어느 시대에는 전쟁 속에서 서로를 지키는 동지로, 또 다른 시대에는 연인으로.
그리고 언제나, 그들은 다시 만났다.
하지만 기억의 마지막, 성우는 유리아와 헤어지는 순간을 보았다.
유리아는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다음 생에서도 다시 만나요.”
그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다시 현재로
성우는 눈을 떴다. 여전히 남해의 정자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유리아는 여전히 그의 앞에 있었다.
“이제 알겠어요?”
유리아가 조용히 물었다.
성우는 숨을 들이쉬었다. 전생이라니. 환생이라니.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럼, 이번 생이 마지막이라던 건?”
유리아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더 이상 환생을 반복할 필요가 없어요. 저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고,
다음 생이란 게 존재하지 않아요.”
성우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난요?”
유리아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당신에게 달려 있어요. 과거를 기억한다는 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이기도 해요.”
성우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도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유리아와의 시간을 더 소중히 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마지막이라면, 그 마지막을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