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데라 왕국, 황실 회의
왕궁 중앙에 위치한 웅장한 회의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낮은 빛을 드리우고,
긴 테이블을 따라 귀족들이 앉아 있었다.
회색빛 눈을 가진 재상 카시우스 드 알메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단정한 수염을 매만지며 차가운 눈길로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병환으로 인해 직접 국사를 주관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러므로 왕세자 전하께서 황실 회의의 주재자로 나서야 합니다."
왕세자석에 앉아 있던 레아(레온)가 눈을 들었다.
아직 성장기의 어린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단단했다.
"그러면 우선, 재정 보고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시우스는 얇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직접 올해의 세수(稅收)와 주요 국고 지출 내역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순간, 회의실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카시우스는 지금 왕세자를 시험하고 있었다.
'이걸 모른다면, 왕세자의 자격이 없다고 선언할 속셈이겠지.'
하지만 레아는 미리 준비된 듯 서류를 들어 올렸다.
"올해 칼데라 왕국의 총 세수는 35만 골드이며, 국고에서 가장 많은 지출이 발생한 항목은 국경 방어 예산입니다. 몬테로즈 제국과의 충돌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지요."
카시우스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공작가들의 토지 수익 분배율에 대한 수정안이 필요합니다."
레아가 말을 이었다.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레아는 한순간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두려움을 보이면 안 돼. 나는 왕세자니까.'
그녀는 왕비가 항상 강조하던 말을 떠올렸다.
"눈앞에 있는 적에게 단 한순간의 약점도 보이지 마라."
카시우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조용히 미소 지었다.
"훌륭하십니다, 전하. 역시 폐하의 피를 물려받으셨군요."
그러나 레아는 그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
'당장은 물러섰지만, 앞으로 더한 시험이 올 거야.'
회의가 끝난 뒤, 왕세자의 전용 훈련장.
루카스가 땀에 젖은 검을 닦으며 말했다.
"오늘 회의에서 정말 잘하셨습니다, 전하."
레아는 검을 쥔 손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야. 재상은 계속 나를 시험할 거야."
루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전하는 이미 완벽한 왕세자이십니다."
"완벽하지 않아."
레아가 중얼거렸다.
"그들은 언제든 나를 끌어내리려고 해."
루카스는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럼에도 저는 끝까지 전하를 지킬 것입니다."
레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루카스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충성스러운 시선이 때때로 부담스러웠지만, 그녀는 위안을 얻기도 했다.
"항상 내 곁에 있어줘, 루카스."
루카스는 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단단히 무릎을 꿇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그러나 레아는 알았다. 이 충성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그날 밤, 왕궁에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전하, 몬테로즈 제국에서 사절이 도착했습니다."
레아는 문서를 받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몬테로즈 제국의 대공, 사브리엘 드 몬테로즈가 직접 칼데라를 방문한다.
'대공이 직접 온다고? 이건 단순한 외교 문제가 아니야.'
그녀는 문서 아래 새겨진 황제의 인장을 바라보았다.
"왕세자 전하께 직접 뵙기를 원하오."
레아의 손끝이 저릿하게 떨렸다.
사브리엘 대공… 그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