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데라 왕궁의 아침.
금빛 햇살이 창을 통해 스며들었다.
레아(레온)는 긴장된 표정으로 손에 든 서한을 읽고 있었다.
"왕세자 전하께서는 오늘 저녁, 저와 단둘이 식사를 하시지요."
- 몬테로즈 대공, 사브리엘 드 몬테로즈"
레아의 손끝이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대놓고 나를 떠보겠다는 뜻이군.'
사브리엘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처음엔 정략 결혼을 핑계 삼아, 그다음엔 왕세자의 정체를 떠보는 발언으로.
'이번 저녁 식사는 또 어떤 함정을 준비해 뒀을까?'
레아는 서한을 내려놓으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제는 내가 그를 떠볼 차례야."
“전하.”
레아가 고개를 들자, 문 앞에서 루카스가 서 있었다.
그는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브리엘 대공과의 단독 만남, 위험합니다."
레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태연하게 답했다.
"내가 위험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를 떠보려는 상대라면, 나도 그를 떠볼 수 있어."
"전하." 루카스가 한 발짝 다가왔다. "그 남자는… 평범한 상대가 아닙니다."
레아는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갈색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그를 만나면, 넌 나를 의심할 거야?"
"…"
루카스는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왕세자야, 루카스." 레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왕국을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마주해야 해. 설령 그가 위험한 상대라 할지라도."
루카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걱정하지 마. 난 쉽게 넘어가지 않아."
그러나 루카스는 알았다.
사브리엘은 단순한 적이 아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분명히 왕세자(레아)를 흔들 생각일 것이다.
그날 저녁, 사브리엘이 머물고 있는 별궁.
레아는 차분한 표정으로 준비된 식탁 앞에 앉았다.
사브리엘은 그녀의 맞은편에서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따르고 있었다.
"왕세자 전하께서 제 초대를 받아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영광에 걸맞은 이야기를 기대해도 되겠군요."
사브리엘이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왕세자 전하는 흥미로운 분입니다."
"대공께서는 꽤 자주 저를 흥미롭다고 표현하시더군요."
"그럴 수밖에 없죠." 사브리엘은 천천히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왕세자 전하를 보면, 어딘가… 모순적인 느낌이 들거든요."
레아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뛰었다.
그러나 그녀는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모순적이라 하심은?"
"왕세자 전하는 칼데라의 후계자이자, 군주의 위치에 서야 하는 분입니다."
사브리엘이 천천히 손가락을 식탁 위에 두드렸다.
"그런데…"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조용히 속삭였다.
"전하는 가끔 스스로가 왕세자가 아니라는 듯한 태도를 보이십니다."
순간, 레아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했다.
"대공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말을 하시는군요."
"그렇습니까?"
사브리엘이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전하. 저에게 솔직하게 대답해 주실 수 있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왕세자 전하께서는… 가면을 쓰고 계신 겁니까?"
그 순간, 레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남자,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그러나 그녀는 단 한순간도 표정을 무너지게 두지 않았다.
오히려 와인 잔을 들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대공께서는 세상에 가면을 쓰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사브리엘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역시 왕세자 전하는 흥미로운 분입니다."
그러나 레아는 알았다.
사브리엘은 단순히 그녀를 흥미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녀의 비밀을 파헤치고 있다.
만찬이 끝난 후, 사브리엘은 문 앞까지 레아를 배웅했다.
"오늘 저녁, 즐거웠습니다. 왕세자 전하."
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즐거웠습니다, 대공."
그러나 문을 나서기 직전—
사브리엘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왕세자 전하. 한 가지는 꼭 기억해 주십시오."
레아가 돌아보자, 사브리엘의 푸른 눈동자가 깊은 어둠을 머금고 있었다.
"전하는… 언제까지나 가면을 쓴 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 순간, 레아의 몸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대공께서 언제까지 제 앞길을 막아설 수 있는지도 궁금하군요."
사브리엘이 피식 웃으며 손을 놓았다.
레아는 단호한 발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사브리엘의 마지막 말이 떠나지 않았다.
"전하는 언제까지 가면을 쓴 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는… 반드시 그녀의 정체를 밝혀내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