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티스 황궁의 심장부,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늘어선 황제의 전당에서는
단 한 사람의 걸음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붉은 카펫 위를 유유히 걷는 이는 황제 카이로스 발렌티스였다.
그의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황제의 손에는 최근 레이건 블랙울프 공작이 보낸 보서가 들려 있었다.
붉은 숲의 이단자, 카시아.
그녀는 단순한 마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숲과 교감하며,
심지어 용마저 길들이는 능력을 가진 존재였다.
황제는 문서를 천천히 펼쳐 들었다.
“카시아는 단순한 반역자가 아니다.
그녀는 숲의 주인이다.
붉은 용은 그녀를 섬기며,
그 존재 자체가 제국의 힘을 위협할 만큼 강력하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황제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숲의 주인이라… 그녀를 길들일 수만 있다면,
그녀의 힘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카시아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를 사로잡고, 굴복시켜야 했다.
그녀의 능력을 온전히 제국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내 명을 전하라."
황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곧바로 고위 장군들이 무릎을 꿇으며 명령을 기다렸다.
"붉은 숲을 포위하라. 카시아를 생포하되, 죽여서는 안 된다.
그녀의 능력은 제국의 것이다. 그 누구도 그녀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장군들은 명을 받들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레이건 블랙울프에게는 더 이상 선택지가 없음을 알려라.
카시아를 직접 데려오지 않는다면, 그 또한 반역자로 간주될 것이다."
황제는 창가로 걸어가 숲이 있는 방향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손을 들어 창문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카시아, 넌 내 것이 될 것이다."
붉은 숲, 한밤중.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며
숲을 은은한 푸른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숲속의 분위기는 이상하게도 무거웠다.
밤공기 속에서 미묘한 떨림이 감돌았고,
동물들은 숲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레이건은 어둠 속에서도 묵묵히 검을 쥔 채 서 있었다.
불길한 기운이 숲을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제국이 움직이고 있다.
카시아가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은 달빛을 받아 깊은 보랏빛으로 빛났다.
그녀는 숲을 바라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레이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숲속의 기류를 살폈다.
카시아의 감각은 정확했다.
바람이 방향을 바꾸고 있었고,
무언가 거대한 움직임이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제국군이다."
레이건은 단호하게 말했다.
"황제가 결코 널 놓아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다."
카시아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싸늘하고도 차분했다.
"그는 나를 원할 겁니다. 내가 가진 힘을, 내 능력을.
나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길들이려 하겠죠."
그녀는 두 손을 모으며 눈을 감았다.
순간 숲이 반응했다. 나뭇잎들이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고,
먼 곳에서 울부짖는 듯한 용의 포효가 들려왔다.
"나는 제국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레이건.
황제의 뜻대로 되게 둘 생각도 없어요."
레이건은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황제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면, 그는 그녀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의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를 잡는 순간,
나는 황제의 도구로 남을 것이다.
카시아는 그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건가요?"
레이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이 검에서 서서히 떨어졌다.
그 순간, 숲속에서 수십 개의 붉은 횃불이 일제히 빛을 발했다.
제국군이 도착한 것이었다.
"이제 선택해야 해요, 공작님."
카시아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와 함께 싸울 것인가, 황제의 개로 남을 것인가."
숲의 적막을 깨며 제국군의 명령이 울려 퍼졌다.
"붉은 숲을 포위하라! 카시아를 생포하라!"
그리고 그 순간, 붉은 용이 하늘을 가르며 포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