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아의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울려 퍼졌다.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날카로웠다.
그녀의 눈빛은 깊고,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레이건은 그녀의 말에 반응하지 않은 채 검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붉은 용의 목을 쓸어 내렸다.
그러자 거대한 용이 날개를 천천히 접으며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공기가 다시금 가라앉았다. 그러나 긴장감은 더욱 팽팽해졌다.
"여기까지 왔다면, 그대는 나를 황궁으로 데려가야겠지요."
카시아가 천천히 용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녀의 맨발이 숲의 붉은 흙을 밟는 순간,
마치 대지가 그녀를 반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레이건은 본능적으로 그녀에게서 뭔가 특별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카시아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가 정말 황제의 사냥개인지,
아니면 자신의 신념을 가진 사내인지."
그리고 그 순간, 붉은 숲이 그녀의 기운에 반응하듯 울렁이기 시작했다.
나뭇잎이 바람도 없이 흔들렸고, 대지가 미묘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붉은 용이 천천히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의 커다란 눈동자가 레이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레이건은 직감했다.
이건 단순한 전투가 아니었다.
그녀가 용과 함께 그를 시험하고 있었다.
붉은 숲이 정적에 휩싸인 가운데, 용이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땅이 흔들릴 정도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레이건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 용은 그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판단하려는 것이었다.
카시아가 가만히 말했다.
"검을 들어야겠어요, 공작님."
레이건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검을 빼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순간부터, 그는 황제가 내린 명령이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이곳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붉은 용이 포효했다.
카시아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운명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붉은 용의 포효가 숲 전체를 흔들었다.
대지는 용의 힘에 반응하는 듯 낮게 울렸고,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레이건의 눈앞이 흔들렸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은 광활한 평원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현실이 아니었다.
하늘은 선혈처럼 붉었고, 끝없는 평원에는 수많은 무덤이 늘어서 있었다.
그가 지나온 전쟁터였다.
"네가 정말 이곳에 설 자격이 있는가?"
낮고 깊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붉은 용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머릿속이 아니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의 음성처럼 온몸을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무덤들 사이에서 형체 없는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레이건이 죽여온 자들의 잔영이었다.
"너는 수많은 피를 흘렸고, 황제의 명을 따라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네 검이 향한 곳은 항상 명령이었지, 네 신념이 아니었다."
그림자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은 원한도, 분노도 없이 그저 묻고 있었다.
너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레이건은 검을 들었지만, 그의 손이 떨렸다.
지금까지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싸움에 대해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었다.
그때, 바람을 타고 카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험을 통과해요, 레이건. 당신이 누구인지 나에게 보여줘요."
붉은 용이 그를 시험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이곳에 발을 들일 자격이 있는가.
그는 황제의 명령을 따를 자인가,
아니면 자신의 길을 찾을 자인가.
갑자기 무덤들이 하나둘씩 붉은 불꽃에 휩싸였다.
그림자들이 레이건을 향해 다가오면서 중압감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레이건이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검을 단단히 쥐었다.
"나는 더 이상 남의 검이 아니다."
그의 말과 동시에, 불꽃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그리고 붉은 용이 마지막으로 포효했다.
시험이 끝난 순간이었다.
레이건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여전히 붉은 숲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카시아가 미소 짓고 있었다.
"공작님. 붉은 숲이 당신을 받아들였군요."
용은 조용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레이건은 선택해야만 했다.
그는 황제의 뜻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